양동마을 풍수설화


양동(良洞)마을 풍수설화

성주봉에서 본 설창산과 양동마을 전경
 
풍수 설화에 의하면 서백당의 집터를 잡아준 지관이 “이 곳은 설창산의 혈맥이 응집된 터라 3명의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다. 3명의 위인 중 2명은 이미 태어났는데 손소 공의 둘째 아들로서 명신이자 청백리인 우재 손중돈 선생과 그의 생질로 해동 18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 선생이 그들이다.
이제 두 명의 현인이 태어났으니 손씨 집안에서는 남은 한 사람의 현인이 손씨 집안에서 태어날 것으로 기대하며, 회재 이후로 시집간 딸이 해산하기 위해 친정에 와도 이 방은 허락하지 않고 다른 일가 집으로 보낸다고 한다. 방문객에게도 부정탈까봐 절대 공개하지 않는 방이다.
그런데 서백당이 삼현지지라는 풍수설화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양동마을의 勿자형국의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빼어난 길지이며, 안채의 뒤쪽으로 내려오는 지맥(地脈)이 그 기운이 넘쳐서 이를 땅속에 모두 감추지 못하고 지상으로까지 석맥(石脈)이 드러나 안채로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산실(産室)로 들어갔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산실(産室)은 서백당 중에서도 중심 되는 혈처에 해당한다.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안락천의 물길
 
서백당의 사랑채와 산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 구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고건축의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양동(良洞)마을의 지명은 초기에는 양월리(陽月里)의 좌편에 있다하여 양좌동(陽左洞)으로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어진 선비를 많이 배출하였다 하여 양좌동(良左洞)으로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의 양동(良洞)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전체가 중요민

관가정 사랑채에서본 성주봉

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마을은 그 규모나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 등에서 그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아 영국의 찰스황태자도 지금은 고인이 된 다이애나 비와 함께 1992년 이 곳을 방문했다 한다.
양동마을은 우리나라의 지정민속마을 다섯 곳 중 하회마을과 더불어 양반들의 생활상과 주거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민속마을이다. 하회마을이 풍산류씨의 단일 동성부락 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두 씨족이 이룬 집성촌마을이라 할 수 있다.
마을을 이루는 두 씨족 중 먼저 입향한 월성손씨나 후에 입향한 여강 이씨 모두 입향조(入鄕祖)의 처가마을이라 이를 두고 양동마을을 ‘외손(外孫) 마을’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월성손씨 입향조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는 풍덕류씨(豊德柳氏) 류복하(柳復河)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청송 안덕(安德)에서 이곳 양동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여강이씨 입향조인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 1463-1500)도 손소의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기 때문이다. 영남대 발간 <<경북지방고문서집성>>에 의하면 류복하(柳復河) 역시도 이곳이 처가라고 한다.
양동마을을 이룬 두 집안 모두 각각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손씨 집안에서는 우참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429) 선생이고, 이씨 집안에서는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18현의 한 사람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이다. 그런데 숙질(叔姪)간이 되는 이 두 인물이 공교롭게도 모두 손씨 입향조 손소 공이 처음 터 잡고 살았던 지금은 당호가 된 서백당(書百堂)의 같은 산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양동마을 풍수형국

500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온 유서 깊은 양동마을은 안강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28번 국도에 세워진 표지판에서 불과 1km 정도만 더 들어가면 되지만 이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雪倉山)에서 뻗어 외청룡을 이루며 달려와 솟은 호명산이 감싸고 있어 마을 입구에 완전히 들어서지 않고는 도로에서는 그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
호명산 모퉁이를 돌아 마을 입구에 들어서야만 여기서부터 양동마을이 시작됨을 알리는 일자(一字)로 길게 지어진 양동초등학교가 나타난다. 이 마을의 분위기와 어울리게 기와로 지붕을 덮어 고풍스럽다.
 
관가정 입구에서 본 호명산
 
초등학교를 지나 마을에 들어서면 다른 반촌과 달리 넓고 평탄한 명당이 아닌 마치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언덕배기에 집을 지어 반촌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가장 높은 언덕배기일수록 고색창연한 큰 기와집이 자리를 차지하고 그 아래로는 규모가 작은 기와집이, 맨 아래에는 초가집이다. 이는 제일 위쪽에는 두 가문의 대종가나 파종가이고, 그 아래에는 두 가문의 자손들이 살던 집이며 맨 아래에 위치한 초가집은 외거노비가 살던 ‘가립집’이 위치하여 반상에 따라 집이 위치한 높낮이가 다르게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마을입구에서는 첫 능선자락에 펼쳐진 일부만 볼 수 있을 뿐 마을 전체의 모습을 한 눈에 담을 수는 없다.
 
 


풍수형국에서 양동마을은 ‘물(勿)’자 형국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文章峰, 161m)에서 갈라져 나온 4개 지맥(地脈)과 지맥사이에 이룬 골짜기 즉 두동골, 물봉골, 안골, 장태골이 ‘勿’자와 흡사한 모양을 갖추고 있음에 따라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 이 네 능선에다 등을 대고 계곡에다 터를 잡아 고가옥과 초가집들이 펼쳐져 있어 마을 안에서는 능선과 우거진 숲에 가려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양동마을을 제대로 살피려면 반드시 마을의 안산인 성주봉에 올라가야 한다. 더구나 풍수적으로 용맥의 흐름이나 이곳의 勿자 형국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성주봉에 오르면 양동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설창산에서 중출한 주맥이 세 겹으로 대(臺)를 이루면서 마치 물결치듯 파도가 밀려오듯 양동마을로 들어오고 있어 그 역량이 대단함을 보여준다. 이곳 풍수형국으로 알려진 물(勿)자와 흡사하다.
풍수에서는 ‘물(勿)’자형 형국을 좋은 양기(陽基)로 친다. 이는 勿자 자체의 글자에는 별 의미가 없으며 글자의 모양이 사신사(四神砂)가 잘 감싸고 있는 장풍국(藏風局) 형태가 되어 좋은 양기로 치는 것이다.
 
양동마을의 勿자형국과 대표적인 가옥 배치도
 
양동마을은 ‘물(勿)’자를 쓸 때의 획 순서에 따라 1,2,3,4번으로 번호를 붙이면 글자를 시작하는 곳이 주산인 설창산에 해당한다. 1획이 끝나는 지점에는 월성손씨 파종가인 관가정(觀稼亭)과 여강이씨 파종가인 향단(香壇)이 위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관가정은 성주봉에서 보아 좌측능선에 등을 대고 있어 백호가 없으나 향단은 1획의 우측능선에 등을 대고 있어 향단에서 보면 관가정이 백호의 역할을 한다.
여강이씨 대종가인 무첨당(無添堂)은 3획의 능선에 등을 대고 있어 1획이 우백호가 되고 4획과 2획이 좌청룡이 된다. 월성손씨 대종가인 서백당(書百堂)은 3획이 안채의 안산 겸 백호가 되고 있으며 2획이 청룡의 역할을 하면서 크게 감싸면서 사랑채의 안산이 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서백당이 다른 집보다 잘 감싸져 있다. 실제로 양동마을에서 "손동만 가"로 부르는 서백당이 가장 吉地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세 명의 현인이 출생한다는 삼현지지(三賢之地)라고 한다.
양동마을의 풍수형국 ‘勿’자는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피 혈(血)자의 형국이 된다. 그래서 마을 입구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은 원래는 남향(南向)이었지만 동향(東向)으로 90도 돌려 새로 앉혔다고 한다. 당초의 남향은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한 피 혈(血)자의 형국으로 보였기 때문이라 한다. 실제로 초등학교건물의 좌향을 재니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정동향이다.
학교의 향을 돌린 것 말고도 이 마을의 勿자 형국 때문에 일제가 당초 이 마을을 통과하도록 계획한 동해남부선철도를 우회시킨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철도가 마을을 통과할 경우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한 피 血자의 형국이 되기 때문에 지금의 동해남부선 철도가 안강 들을 가로질러 이 마을을 향해 곧장 달려오다가 이 마을 앞에서 90도에 가깝게 우로 꺾어 수 km를 우회하여 놓게 된 것이다.
청화산인 이중환(1690-1752)의 저서 <<택리지>>에는 사람이 사는 곳을 정하는 기준으로 가장 먼저 수구(水口)를 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무릇 수구(水口)가 엉성하고 넓기만 한 곳에는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넓은 집 천 칸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水口)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구해야 한다. 높은 산이나 언덕, 역으로 흘러드는 물이 힘 있게 판국을 가로막았으면 좋은 곳이다. 막은 것이 한 겹이어도 참으로 좋지만 세 겹, 다섯 겹이면 더욱 좋다. 이런 곳이라야 완전하게 오래 세대를 이어나갈 터가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중환이 주장하는 수구가 꼭 닫힌 곳은 결국 청룡, 백호가 잘 감싸주는 곳을 말한다. 양동마을은 勿자 형국이라 勿자의 1획에 해당하는 곳에 터 잡은 몇 집을 제외한 마을 전체가 계곡마다 터 잡고 있어 용호(龍虎)로 잘 감싸고 있다. 그래서 마을이 터 잡은 각 계곡마다 득수(得水)한 내당수는 각 계곡마다 좁은 하나의 수구를 만든다. 자연히 수구가 좁을 수밖에 없다. 이들 각 계곡에서 빠져나온 물들이 마을 가장 안쪽 계곡인 장태골에서 득수하여 마을 전체를 감싸고 좌수도우(左水到右)하며 흐르는 물과 합수하여 마을 옆을 우수도좌(右水到左)하며 흐르는 안락천(安樂川)으로 빠져나간다.
다음으로 양동마을의 들을 보면 안락천 너머로 기름진 안강 들이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한때는 이 넓은 안강 들의 반이 양동마을의 손, 이 양 가문의 소유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역으로 흘러드는 물을 보면 마을의 백호자락을 감싸고 흐르는 안락천, 그 너머에는 기계천과 칠평천이 흐르고 있어 세 겹이나 된다. 풍수에서는 역으로 흘러드는 물은 마을의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아주 귀한 물로 본다. 여러 겹의 역수가 겹겹이 가로 막으면 마을 안의 생기는 더 잘 갈무리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역수는 마을에서 보이지 않아야 이를 암공수(暗拱水)라 하여 더 귀한 물로 친다. 역수가 마을에서 보인다는 것은 청룡, 백호가 마을을 완전히 감싸지 못하여 수구가 엉성하고 넓기 때문이다. 양동마을의 역수는 모두가 마을의 중심에서는 보이지 않는 암공수다.









태초에 나는 개그이야기를 만들었다.
내말을 믿고 나를 따르면 천당,
내말을 믿지않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지옥,
나는 하늘나라(우주)에 사느니라.

그럼 난 외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