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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국영화 BEST 10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2008년 외국영화 베스트 10’에 이어, ‘2008년 한국영화 베스트 10’을 올립니다. 이 리스트 역시 2008년 1월1일부터 12월18일까지 한국에서 정식 개봉한 작품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영화제에서만 상영된 작품은 제외했습니다. 물론 베스트 10 순위는 영화평을 직업적으로 쓰고 있는 저의 미학적인 판단 기준과 주관적인 취향에 따른 결과입니다. 올해도 꼭 보려고 했는데 놓친 영화들이 몇 작품 있었음을 밝힙니다. 특히 ‘경축! 우리 사랑’ ‘이리’ ‘어느 날 길 위에서’를 보지 못한 게 걸리는데, 이 작품들을 봤다면 혹시 리스트가 약간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올 한해도 100편이 넘는 한국영화가 개봉됐습니다. 하지만 예년에 비해서 주목할만한 수작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올해는 미국영화를 비롯한 외국영화들 중에서 좋은 작품이 유독 많아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듯 합니다. 내년에는 기대가 되는 한국영화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 작품들이 높은 완성도를 지닌 채 속속 개봉되어, 내년 말 이맘때쯤에는 베스트 10 리스트를 만들면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0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감독-김지운)
그렇습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양식과 인물들이 등-퇴장하는 지점에서 난맥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 희대의 오락영화는 정말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 결과 관객들은 이제껏 다른 어떤 한국영화도 보여주지 못한 강력한 이미지들에 온전히 사로잡힐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부류의 인간들이 거칠 것 없는 만주 벌판을 뽀얀 먼지 속에서 질주하는 장면은 사실상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블록버스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세 배우는 쇼트마다 멋진 피사체가 되어 박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현기증이 일 정도의 테크닉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라스콜리니코프나 햄릿 같은 인물은 없습니다. 구원이나 희망의 깊은 상징이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영화는 스펙터클 자체만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 운명과 매력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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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만큼 사실감 넘치는 멜로도 드물 겁니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대단한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전형적 연애의 생노병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이 영화 속 사랑은 보는이들의 가슴에 적잖은 울림을 남깁니다. 사랑의 격정과 권태가 남기는 파장이 고스란히 관객을 전염시켜, 세상의 그 모든 연애의 추억을 다시 떠올려 곱씹도록 만드는 거지요. 그게 가능한 것은 이 영화의 디테일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 최형인이 서로 교감하는 연기가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을 때 더욱 빛나는 ‘사과’의 배우들은 실로 뛰어난 연기 앙상블을 보여줍니다.
8위. ‘멋진 하루’(감독-이윤기)
‘멋진 하루’는 정말 단단한 영화입니다. 원작을 훌륭하게 각색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이윤기 감독은 더없이 깔끔한 연출력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어디까지 전진하고 어디서 멈춰서야 하는지,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고 어느 부분에서 끝나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멜로 장르의 본능적인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오버하지 않는 이 작품은 스스로 마련한 영화적 그릇 안에서 내내 솜씨좋게 찰랑거리지만 단 한 번도 넘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서를 다루는 뛰어난 세공력 덕분에 이 수작 소품은 극장을 나선 뒤에도 여운이 오래도록 이어지도록 합니다. 언뜻 보이는 것보다 훨씬 연기하기 어려운 배역을 맡아 전도연은 제 몫을 충실하게 해냈습니다. 그리고 ‘추격자’에 이어, 캐릭터를 맞춤복처럼 입고 능란하게 연기한 하정우는 올 한 해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준 배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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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고고 70’(감독-최호)
‘고고 70’은 올해 가장 저평가된 작품입니다. 향후 충무로에서 음악영화들이 나올 때마다 반복해서 거론될 이 수작은 응분의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뛰어난 음악영화들만이 체화할 수 있는 현장감이 실감나게 살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삶의 애환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무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제까지 음악 밴드를 소재로 삼았던 작품들의 관습적인 진행 방식과 달리, ‘고고 70’은 데블스라는 그룹 자체를 하나의 캐릭터처럼 다루고 그린 100% 음악영화입니다. 클라이맥스 콘서트 장면의 카타르시스는 실로 대단하지요. 권력의 억압이 서슬 퍼렇던 70년대에 대해 정치적인 대사를 사용해 직설적으로 비판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대중문화가 어떻게 저항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성숙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조승우와 차승우는 대체불가능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신민아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이 영화의 배우들은 좀더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6위. ‘추격자’(감독-나홍진)
2008년에 개봉된 100편이 넘는 한국영화 중에서 ‘추격자’만큼 주목받고 사랑받은 작품은 없을 겁니다. 이 영화는 유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휩쓸었고, 5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였으며, 대부분의 관객들과 평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추격자’의 그러한 성과는 운이 아닙니다. 서스펜스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은 나홍진 감독은 능수능란하기 이를 데 없는 연출력을 선보이며, 그가 이제 첫 장편을 만드는 신인이란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에게는 극중 범인이 휘두르는 망치처럼 파괴력이 큰 묘사 능력이 있고, 이야기의 패를 미리 다 보여주고도 흥미진진한 레이스를 끝까지 벌일 수 있는 자신감 넘치는 화술이 있습니다. 그리고 김윤석과 하정우는 두 마리 짐승이 물어뜯는 순간의 넘치는 야성과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그건 스릴러 장르의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상급의 연기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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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충무로는 유달리 많은 액션 영화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다큐멘터리 ‘우린 액션 배우다’였습니다. 그 자신 스턴트맨이 되기 위해 긴 훈련을 받은 바 있는 정병길 감독은 그늘에서 묵묵히 일하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찍은 이 다큐멘터리를 전혀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카메라에 담기는 인물들과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이미 찍힌 텍스트도 능동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대단히 인상적인 기록영화 한 편이 나왔습니다. 꽤 많은 인물을 다루지만 그 한 명 한 명에 제대로 액센트를 줌으로써 캐릭터들을 생생히 살려냈습니다. 이 영화는 시종 유쾌하고 유머러스합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끝내 뭉클한 순간을 잡아냅니다.
4위.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감독-신동일)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입니다. 쇼트마다 예리한 송곳을 감춰두고 있는 듯 콕콕 찔러대는 이 작품은 결국 보는 이의 무뎌진 어깨를 죽비처럼 매섭게 내려칩니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올 한 해 나온 작품 중 가장 정치적이면서 가장 윤리적인 영화입니다. 단지 세 명의 등장 인물이 있을 뿐인데 그들 사이 관계의 지형도가 권력이나 계급 관계에 따라서 변하는 양상은 시종 흥미진진합니다. 때론 지나친 결벽증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런 영화를 만들 순 없습니다. 아마도 삶 전체에 걸쳐서 스스로를 날카롭게 벼려온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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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비몽’(감독-김기덕)
나비의 날개와 고양이의 발을 함께 갖고 있는 듯한 ‘비몽’은 올해 나온 가장 아름다운 한국영화입니다. ‘빈 집’과 함께 김기덕 감독 영화세계의 정점을 찍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이 영화에는 구조로 치환되지 않는 매력적인 이미지들이 러닝 타임 내내 훨훨 나비 춤을 추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갈대밭 장면은 가슴이 철렁할만큼 강력합니다. 데뷔작 ‘악어’를 통해 현실의 진창에서 시작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은 분노와 절규로부터 이제 서서히 슬픔과 관조 쪽으로 그 정서의 축을 옮겨가고 있습니다. 김기덕은 언제나 김기덕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몽’은 가장 쓸쓸하게 빛을 내는 그의 영화입니다.
2위. ‘미쓰 홍당무’(감독-이경미)
이 작품에 대해 “전대미문의 캐릭터 영화”라고 처음 표현했던 것은 사실, 제작자인 박찬욱 감독이었습니다. 하지만 ‘내부자’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누차 반복된 평들에서처럼 저 역시 그 말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양미숙이란 캐릭터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형의 인물이었으니까요. 캐릭터 구축에서 에피소드 설정과 작은 디테일까지, ‘미쓰 홍당무’는 신선한 재기로 가득합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 ‘루저’(loser)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진정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독특한 유머 감각은 가히 SF적입니다. 공효진은 양미숙을 연기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배우였습니다. 그리고 서우와 황우슬혜라는 두 신인 여배우들은 공효진의 넘치는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아내면서도 결코 묻히지 않았습니다. 이경미 감독은 이제 막 데뷔하는 감독에게서 기대되는 태도와 재능 모두에서 커다란 신뢰를 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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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밤과 낮’(감독-홍상수)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지난 20년간 가장 중요한 한국영화 데뷔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데뷔 후 12년 차에 나온 그의 8번째 작품 ‘밤과 낮’은 2008년 최고의 한국영화입니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언제나 뛰어났지만, 특히 ‘극장전’ ‘해변의 여인’ ‘밤과 낮’으로 이어지는 근래 그의 작품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흥미롭고 탁월합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기만 하면 배우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전과 완전히 다른 연기를 합니다. ‘밤과 낮’을 통해 보는 김영호와 박은혜는 실로 놀랍습니다. 아마 그들 역시 스스로에 대해서 놀랐을 것입니다. 어떤 평자들은 홍상수 감독이 같은 자리에서 맴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카메라워크에서 인물을 다루는 태도까지, 지속적인 변천을 겪어왔습니다. ‘밤과 낮’에서 특유의 인류학적인 관찰력과, 통념이나 위선을 날카롭게 헤집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가차없지만, 결함 많은 인간의 딜레마를 담아내는 그릇은 체온에 가깝게 데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간 내내 세상을 떠돌던 홍상수의 오딧세이 같은 주인공은 ‘밤과 낮’에 이르러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밤과 낮’은 완벽하게 짜여진 홍상수의 영화적 문장에 찍힌 첫번째 구두점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펼쳐질 그의 두번째 문장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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