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철학

동이전? 동이열전? 동이족? 궁금하네.

by nanumi posted Jun 1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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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조선의 건국 시기는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개국시기는 중국의 요 임금과 같다'고 한 이래 고조선의 건국시기는 민족의 자존심과 관련되는 문제로 인식돼 왔다. 


칭기스칸? 한민족? 칸(한) 칭호를 사용했다는 것

 


공자·기자·백이·숙제 모두 동이족의 후예 

 

동이족의 유별난 풍습 = 제사

 

“동이족(東夷族)은 군자의 나라요, 불사의 나라(후한서 동이열전)”

 

은(상)나라의 왕족인 기자(箕子)와 고죽국의 왕족인 백이(伯夷)·숙제(叔齊)는 공자에 버금가는 군자로 공자·기자·백이·숙제 모두 군자의 나라, 불사의 나라인 동이의 후예들이다.

 

사마천은 ‘백이열전’을 쓰면서 백이·숙제의 죽음을 애도하며 울부짖었다. 

 

공자는 일찍이 “은에는 미자(微子)와 기자, 비간(比干) 등 3인(仁)이 있었다”고 했다. (사기 송미자세가) 3인 모두 은(상) 마지막 왕 주(紂)왕의 친척이다. 


기자는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상아 젓가락을 쓴다면 조금 뒤엔 옥잔을 쓸 거고, 더 조금 뒤엔 수레와 말, 궁실의 사치로움이 도를 넘을 것이다.” 

 

간언이 통하지 않자 기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했다가 주왕에게 들켜 노예가 되었고, 풀려난 뒤에는 슬픔에 잠겨 거문고를 두드리며 세월을 보냈다. 

 

참담했던 시절 거문고를 타며 시름을 달랬던 것은 훗날 공자도 마찬가지였으니, 역시 동이의 핏줄은 통하는 것일까?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에 약수가 있다. 사방 2천리이고 본래 예(濊)의 땅이다.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는데 중국의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 삼국유사-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에 태어났으며 몽골의 고려 침입기에 성장했다.

 

국사 일연이 인용했다고 보는 위서(魏書)는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 30권이고 이 가운데 <동이전>은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 포함된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등 이른바 ‘동이(東夷)’에 관한 기록이다.

 

 

삼국지_동이전.jpg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고구려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濊貊)과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夫餘)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戶數)는 3만이다. 

 

큰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다.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 물(澗水)를 식수로 한다. 

 

농사지을 좋은 땅이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의 습속은 음식을 아껴 먹는다. 

 

그러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또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왕이 있다. 

 

벼슬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雛加),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 衣), 선인(先人)이 있는데,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동이의 옛말에 따르면,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한다.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디 다섯 족(族)이 있다.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졌다. 지금은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朝服)과 의책(衣 )을 받아갔으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 溝 )라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관직을 설치할 때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으로서 대가인 자는 모두 고추가로 불린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 비록 왕은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嫡統)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다.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따로 제사를 지낸다. 절노부도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그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더하였다. 

 

모든 대가(大加)들도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었다. 그 명단은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마치 중국의 경(卿인)이나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은 것으로, 모임이 있을 때 좌석 차례에선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위치에는 앉지 못한다. 

 

나라 안의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앉아서 먹는 인구가 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下戶)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 

 

나라 안의 촌락마다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으니 부경( 京)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 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 부여와 같지 않다. 

 

길을 걸을 때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들의 공식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쓴다. 

 

(중국의) 책과 비슷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수신(隧神)을 맞이한다. 

 

나라의 동쪽 위에 모시고 가서 제사를 지낸다.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자리에 모신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그 풍속은 혼인할 때 말로 미리 정한다. 

 

여자의 집에서 집 뒤에 작은 별채를 짓고 서옥( 屋)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 집 문밖에 도착하여 자기 이름을 밝히고 궤배( 拜-무릎을 꿇고 절함)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함께 자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거듭하면 신부 부모가 그 때서야 작은 집에 가서 자도록 허락한다. 

 

돈과 폐백은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 

 

금,은 재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 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몸이 작아 산에 오르기 편리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모두 복속되었다. 

 

또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구려는 대수(大水: 압록강인 듯) 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주하였다.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가는 작은 강이 있다. 

 

고구려의 별종이 이 소수(小水:  佳江인 듯)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그 곳에서 좋은 활이  생산된다.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 

 

 

 
왕망(王莽) 초년에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를 징벌하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억지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을 넘어 도망한 뒤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 살해되었다. 

 

주, 군, 현이 그 책임을 (고)구려후 도( )에게 전가하였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우에게 칠 것을 명하였다. 

 

우는 구려후 도를 만나자고 꾀어 목을 베고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 삼국사기 유리왕 31년 기사에 따르면 장수 연비(延丕)의 목이 베이었다고 함)  

 

왕망이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란 국호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때 후국(侯國)이 되었는데, (후)한 광무제 8년(32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비로소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이 보인다. 

 

상제( 帝), 안제(安帝) 연간(106-124년)에 구려왕 궁(宮 : 태조왕)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므로 디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蔡風)과 현도태수 요광(姚光)은 궁이 두 군에 해가 된다고 여겨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강화를 청하자 두 군은 진격하지 않았다. 

 

궁이 몰래 군대를 보내 현도를 공격하였다. 

 

 

후성(侯城)을 불사르고 요수(遼隧)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그 뒤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채풍이 가볍게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다 패하여 죽었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백고가 태조왕의 아우 신대왕이다) 

 

순제(順帝), 환제(桓帝) 연간(126-167)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노략질하였다.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년)에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희평(熹平 : 영제의 연호, 172-177) 연간에 백고는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탁(公孫度)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하자, 백고는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 연인(然人)을 파견하여 공손탁을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해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때부터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족(胡族) 5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헌제(獻帝)의 연호. 196-219)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성읍과 촌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각 하호 3만여 명을 이끌고 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가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오늘날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아들은 구려에 계속 머물렀다. 

 

지금 고추가 박위거( 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를 공격하므로 현도와 요동이 힘을 합쳐 반격해 크게 격파하였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위궁(位宮이라 하였는데 이이모가 죽은 뒤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지금의 고구려왕 궁(동천왕) 이 바로 이 사람이다. 

 

증조의 이름이 궁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장정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침략하다가 나라가 잔파(殘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왕도 태어나자마자 역시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부른다. 

 

그의 증조부와 닮았기 때문에 위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위궁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경초(景初: 위 명제(明帝) 연호. 237-239) 2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토벌하니, 위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도왔다. 

 

정시(正始: 위 제왕(齊王)의 연호. 240-248) 3년에 궁이 서안평을 노략질하였다. 

 

5년에는 유주자사 관구검( 丘儉)에게 격파당하였다. 

 

그 때의 사실이 검의 열전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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