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철학

동이족 공자 요임금 진시황

by nanumi posted Nov 0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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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 공자 요임금 진시황 

 

공자(孔子)는 동이족(東夷族 : 배달민족)

공자는 한(漢) 태조 유방과 위(魏) 조조처럼 동이족이다. 관련 기록을 살펴본다.

①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 : 은(殷)은 동이족 나라다.

② 공자가 쓴 공자세기(公子世家), 예기(禮記): 나는 은(殷) 후손이다. 

③ 맹자(孟子) 
   주(周)가 고조선 은(殷)을 치고 들어선 뒤 
   은의 공자가문은 7대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다. 
   7대 후부터 주(周)에 출사(出仕)했는데 그 10대손이 공자다.

④ 공자가문 족보(族譜) 
   장백산에서 날아온 학이 곤륜산에서 노닐던 암사슴과 만나니, 
   그 사이에서 나온 사람이 공자다. 
   ▲ 장백산, 곤륜산은 동이족 산이었다.

⑤ 서경(書經) 주서 홍범(洪範)편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의 가르침을 전할 뿐이다. 
   ▲ 4서 3경은 대부분 '홍범' '구주'를 풀어 해설한 것이다.

⑥ 설문해자(說文解字) : 한문자전 
   동이(東夷)란 동쪽에 사는 사람이다. 
   오직 동이(東夷) 만이 대의(大義)를 따르는 대인(大人)들이다. 
   동이(東夷)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는 법이라 
   그 곳은 군자들이 죽지 않는 나라다. (有君子不死之國) 
   고로 공자도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나는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인 구이(九夷)에 가고 싶다. 하고 
   뗏목을 타고 바다로 띄웠다 한다. 
   참으로 이유있는 일이로다. 
   <夷 東方之人也 唯 東夷從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故孔子曰 道不行 吾欲之君子不死之國九夷 承孚 浮於海 有以也.> 
   ▲ 구이(九夷) : 동이(東夷)의 아홉 나라. 
      고대 배달한국은 아홉 개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다.

⑦ 논어 : 공야장편 자한지리(公冶長篇 子漢地理) 
   동이는 천성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마음 아프게 여겨 
   구이(九夷)나라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東夷天性柔順 異於三方外 故 孔子曰 悼道不行 設文解字 欲居九夷)

⑧ 동이열전(東夷列傳) : 공자 7대손 공빈(孔斌) 씀 
   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 :고대 한국)라 한다. 
   훌륭한 단군(檀君)이 계셨는데 구이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요(堯)임금 때 일이다. 
   순(舜)임금은 동이(배달)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동이에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는 도에 통달한 분이 계셨는데 
   황제헌원씨(중국 시조)가 그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워 와서 
   염제 신농씨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하 우임금의 도산회의에 
   동이의 부루께서 친히 와주셔서 나라의 경계가 정해졌다. 
   동이인 유위자는 하늘이 내신 성인인데 
   이윤이 그 문하에서 배워서 현명한 신하가 되었다. 
   동이는 비록 나라가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박하고 후덕하여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함부로는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방예의군자국(東方禮儀君子之國)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은(殷) 태사(太師) 기자(箕子)가 
   주(周)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 땅 (고조선)으로 갔고 
   나의 할아버지 공자께서 동이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나의 벗 노중련(魯仲連) 역시 동이로 가고 싶어 한다. 
   나도 역시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 
   예전에 동이 사절단이 온 것을 보니 대국인(大國人)다운 모습이었다. 
   동이는 대강 천년이상 전부터 중국과 우방으로 서로 왕래했다. 
   <위 안리(安釐)왕 10년 곡부에서 씀.>

 

 

[출처] 공자는 동이족 단군의 후손인가?|작성자 안녕님

 

 

▶공자가 과연 은나라의 후예인지 면밀히 살펴보자. 『사기』 「공자세가」를 보자. 
공자는 노나라 창평이란 도시(鄕) 추읍에서 태어났다. 그 선조는 은의 망국민 송나라 사람이니 공방숙이다. 방숙이 백하를 낳고, 백하가 숙량흘을 낳았다. 숙량흘과 안씨의 딸이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孔子生魯昌平鄕陬邑. 其先宋人也 曰 孔防叔, 防叔生伯夏, 伯夏生叔梁紇, 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 사기 권 46, 공자세가). 
기원 전후 1~2세기에 『예기』를 쓴 한의 유학자들은 공자는 꿈에서도 은나라로 가고 싶어 하였다고 적는다. 
공자가 말했다. “賜(사: 자공)야, 네가 어찌 이렇게 늦게 오느냐. 하후씨(夏后氏)는  동계(東階) 위에 빈소를 마련했으니, 죽은 자가 아직 주인의 자리[阼階=동계]에 있는 것이다. 은(殷)나라 사람은 두 기둥 사이에 빈소를 마련했으니, 손님의 자리와 주인의 자리 사이에 끼인 것이다. 주(周)나라 사람은 서계(西階) 위에 빈소를 마련했으니, 죽은 자를 여전히 손님으로 여긴 것이다. 나는 은(殷)나라 사람인데, 내가 어젯밤에 두 기둥 사이에 앉아 궤향(饋饗)을 받는 꿈을 꾸었다. 지금은 성명(聖明)한 임금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천하에 그 누가 나를 종주(宗主)로 받들어 이 존귀한 자리에 앉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징조이다.” 그 후 공자가 7일 동안 병들어 누워 있다가 돌아가셨다(夫子가 曰하사대 “賜아 爾來가 何遲也오 夏后氏는 殯於東階之上하니 則猶在阼也이오 殷人은 殯於兩楹之間하니 則與賓主로 夾之也이오 周人은 殯於西階之上하니 則猶賓之也이라 而丘也는 殷人也이노니 予가 疇昔之夜에 夢坐奠於兩楹之間하니 夫明王이 不興이어니 而天下가 其孰能宗予이리오 予가 殆將死也이라” 하더시니 蓋寢疾七日而沒하시다). 예기 단궁 상, 3-58)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현비유인밀양손씨신위(顯妣孺人密陽孫氏神位)라 하지 않던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받들어 모셔야 할 신(神)이었다.갑남을녀, 장삼이녀, 초등급부의 영혼에게도 지고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이는 耶蘇氏를 절대지존으로 모시는 서방 오랑캐들은 죽었다 깨나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이었다. 야소씨만큼 심하지는 않으나 절대를 숭상하고 석가불의 영혼만 지고하다고 믿기는 마찬가지였다. 
http://blog.ohmynews.com/songpoet/163659

 

 

▶흥미있는 이야기 “공자는 동이족이었다” 
http://boxun.com/hero/FENGCHICHEN/16_1.shtml

孔子是东夷人 
공자는 동이인이었다

张发颖在《凤图腾东夷人及其文化贡献》〈《社会科学辑刊》200-1年第2期〉一文中认为东夷文化范围的遗存遍布燕山南北,包括辽-宁阜新查海文化,沈阳新乐文­-化,-山东大汶口文化,河姆渡文化以-及其后的赵宝沟、兴隆洼、牛河梁及殷商文化(http://www.chnmus.net/hall/prehistory/ph006.htm
장발영(짱파잉 Zhāng fā yǐng)은 ‘봉황이 날개치고 오르려 하다(맞나?-_-;;), 동이인과 그 문화적 공헌’-사회과학집간 2001년 제2기- 라는 책의 글에서 ‘동이 문화 범위에 있는 유적은 연산남북에 분포되어 있는데, 요녕성의 부신사해문화와 심양의 신락문화, 산동성의 대문구문화, 하모도문화와, 그 뒤의 조보구, 흥륭와、우하량급은상문화를 아우르고 있다고 하였다. (http://www.chnmus.net/hall/prehistory/ph006.htm)

关于孔姓的来源,《广韵》上面有这样的记载:"殷汤之后,本自帝喾次妃兰狄吞乙卵生契,赐姓子氏;至成汤以其祖吞乙卵而生故名履,字太乙,后代以子加乙,始为孔­-氏。至宋孔父嘉,遭华父督之难,其子奔鲁,故孔子生于鲁。" 
공(孔)씨 성의 연원에 관하여, ‘광운’ 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은나라 탕왕의 후예이다. 원래 제곡(전설상의 황제)의 둘째 왕비인 란적탄을란이 ‘계’를 낳아, 성씨 ‘자(子)를 하사하였는데, 성탕(은나라 BC1600~BC1046 개국 왕)에 이르러 그 조상인 탄을란이 낳았다 해서 이름을 ‘리’, 자를 ‘태을’이라 하였고, 후대에 ‘자(子)’에 ‘을(乙)’을 추가해서 ‘공(孔 = 子+乙)’이라 하여 공씨성의 시작이 되었다. 송(춘추시대 국가)나라 ‘공부가’라는 사람에 이르러, ‘화부독’의 난을 만나, 그 아들이 노나라에 도망왔는데, 그래서 공자가 노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由此看来,孔性是出自殷商的子姓,而殷商的开国之君殷汤,则是帝喾的次妃所生的儿子契的后代,殷汤为了纪念自己的祖先是吞乙卵而生,就取字为乙,传了若干代,到­-了春秋时代,在宋国的孔父嘉,为华督所杀,他的儿子就跑到鲁国避难,并且在鲁国定居,所以孔子才会是鲁国人。 
이로보건데, 공씨 성은 은(상)나라의 ‘子(자)’씨 성에서 온 것이며, 또한 은(상)나라 개국 임금인 탕왕은 바로 ‘곡’황제의 둘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 ‘계’의 후손이며, 은나라 탕왕은 자기의 조상인 ‘탄을란’에서 태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乙(을)자를 취하여, 몇 세대를 이어오다, 춘추시대(BC 770~BC 403)에 이르러 송나라의 ‘공부가’라는 사람이 ‘화독’에 의해 피살되고, 그의 아들이 노나라로 피난을 와서, 노나라에 거주를 정하게 된다. 공자는 이로써 노나라 사람이 된 것이다.

结论....孔子是东夷人 
결론은.... 공자는 동이인이라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dawei0406/130018801056

 

 

▶공자도 배달민족의 후예
사마천 曰 "은나라는 동이족의 나라이다."
그리고 공자님은공자세가, 예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은나라의 후손이다"
http://blog.naver.com/kangsu2040/150030900350

 

 

▶공자께서는 조상의 도인 동이족 혈통을 이어받은 요순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시고(祖述堯舜) 문왕과 무왕의 도를 본받아 명백히 하시며(憲章文武) , 위로는 천시를 본받고 아래로는 물과 흙을 따랐다.(仲尼祖述堯舜, 憲章文武; 上律天時, 下襲水土.)- 그 주석에 祖述者, 遠宗其道. 憲章者, 近守其法. 律天時者, 法其自然之運. 襲水土者, 因其一定之理. 皆兼內外該本末而言也.)(참고:맹자에 문왕은 동이족 후손으로 서이(西夷)라 했으니 이는 그가 근본은 동이족임에도 불구하고 서하(西夏)의 머리인 주(周)를 세웠다 하여 이를 사적으로 가름하기 위해 맹자가 별도로 문왕을 서이라 칭한 것이니 맹자는 공자의 화하사관을 그대로 이은 것이다)-요, 순은 동이족임을 반드시 주지하고 읽을것 
http://blog.naver.com/digitalan/10129357067

 

 

▶공자 초상화로 보는 공자는 동이족인가?
http://blog.daum.net/manjumongol/27

 

 

▶원로 국어학자인 진태하(사진) 인제대 석좌교수가 “한자는 우리글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촉발됐다. 진 교수는 지난 4월 중순 한자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자는 중국 문자가 아니라 우리 조상 동이(東夷)족이 만든 우리글이며 중국 학계에서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데 우리만 모른다”고 지적했다. 진 교수 주장의 핵심은 동이족의 문자가 3400년 전 은나라 때 갑골문에서 발전한 문자이며 이것이 바로 한자라는 것
진 교수가 ‘중국의 임어당(林語堂)과 사학자 왕옥철(王玉哲)도 중국의 문자는 모두 동이족이 창조했고 공자도 동이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
http://blog.naver.com/brucelee55/150107464741

 

 

▶공자, 맹자, 강태공, 백이 숙제는 동이족이다
고조선과 단군의 실체와 역사를 중국의 사료로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 온 심백강(47세)) 민족문화연구원장이 이번에는 동이가 고조선의 뿌리이며 동양문화와 사상의 중심이었다는 자료를 발췌해 묶은 사료집 ‘사고전서의 동이사료’와 해제를 펴냈다.
지난 해 출간한 ‘조선왕조실록중의 단군사료’ ‘단군기록 사종’ 사고전서의 단군사료‘ 등에 이은 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 8~12집이다.
사고전서는 중국 청나라 때 편찬된 책으로 진秦에서 청에 이르는 중국의 역대 주요 서적과 문헌을 집대성해 7만 9,000여 권으로 만든 총서이다.
중국에서도 역사연구의 기초자료로 통하는 이 총서를 토대로 동이족 관련 자료를 모으는 작업은 강단사학계나 재야사학계를 통틀어 처음이다.
http://b1bzb1.egloos.com/3549964

 

 

 

진시황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중국 역사 기록

 

기원전 221년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된 다민족 국가 진 왕조를 세운 진시황(秦始皇).

황제 제도, 군현 제도, 관리 제도와 이에 상응하는 법률을 만든 그는 중국 최고의 황제로 일컬어진다.

 

진시황(기원전 259년~기원전 210년)의 본명은 ‘정(政)’이고 조상의 성은 영()이다.

사실 그의 조상의 성 영()은 짐승을 길들여 순(舜)에게 바쳐 그 공로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순 임금은 잘 알다시피 요 임금과 함께 치세를 잘 한 통치자로서 동이족으로 알려져 있다.

『맹자(孟子)』 8편에 따르면 “순은 제풍(諸馮)에서 태어나 부하(負夏)로 이사하였으며, 명조(鳴條)에서 죽었다.

제풍, 부하, 명조는 동이의 땅이며 순은 동이 사람이다” 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진시황도 동이족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은 곧 사실로 입증된다.

 

중국의 역사학자 리우웨이는 저서『황제의 나라』에서 “진나라 사람은 동이족(東夷族)의 한 분파이며, 황하 하류 동해(東海·우리나라의 서해에 해당) 바닷가에서 유목생활을 했다” 고 밝히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학자 저우스펀은 저서 『중국 역사 11강』에서 “진은 역사가 유구한 씨족으로 동이족의 한 갈래에 속하는데, 황하 하류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 조상은 순(舜) 임금 밑에서 날짐승을 길렀고, 그 때문에 영()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중국역사학자들도 진시황이 동이족임을 시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진시황이 동이족인 이유를 살펴보자.

먼저 진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말 다루는 기술 이 뛰어난 데 있었다.

 

우리는 늘 한민족이 ‘기마민족’이자 ‘백의민족’임을 내세우고 있으나 왜 우리가 자랑스러운 기마민족인지를 알지 못했다.

만일 진시황이 동이족이라면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진시황의 조상인 양공(襄公)은 기원전 776년 말을 잘 길들인 공로를 인정받아 견(·현재 섬서성 농현 동남쪽)을 봉읍으로 하사받았다. 진은 말 방목으로 유명했으며, 이는 그들의 주요한 경제 원천이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예로부터 ‘양마(養馬)’와 ‘애마(愛馬)’의 전통이 있었는데, 말이 없었다면 진 왕조의 찬란한 발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진은 나라를 세운 후 양마 사업을 건국의 기초로 삼을 만큼 말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그러한 나라였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말 문서를 만들고 매년 정기적으로 비교, 평가하여 우량 품종을 선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말의 사육과 훈련, 의료 등의 관리 문제에 대해 ‘구원율(廐苑律)’을 제정하고 양마 사업에 손해를 입히는 행위를 엄하게 처벌하였다.

이 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진의 군마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여 통일로 가는 길을 다졌다.

 

​진시황 능묘가 동쪽 향한 이유

 

진시황 능묘가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도 진시황이 동이족임을 암시한다.

중국 역대 제왕의 무덤은 대체로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진의 왕들은 선조 때부터 진시황에 이르기까지 그 무덤이 모두 서쪽에 앉아 동쪽을 향하고 있다.

심지어 진시황의 부장묘들과 병마용으로 이루어진 군대까지도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다.

진시황의 능원 이외에도 함양 도성의 궁전과 안팎의 이궁 별관도 모두 다 이 법칙을 따르고 있다.

이는 마치 북쪽에서 남하해온 우리가 북망산(낙양 북쪽에 있는 작은 산)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비록 짐승에 불과하지만 여우도 죽을 때 자기가 살던 굴이 있던 곳으로 머리를 똑바로 한다(首邱初心)는 데 하물며 사람임에랴.

다시 말해 동쪽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요동과 산동을 거쳐 점차 서쪽 중원으로 진출한 동이족(진시황)이 고향땅을 그리워한 나머지 마지막 이승을 떠나는 마당에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음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진시황 능묘가 동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진의 종교가 동방을 숭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중국 서안에 있는 병마용갱을 방문해본 사람이면 진나라 용사의 풍채를 보고 한번쯤은 놀랐을 것이다. 그때 ‘저 용사의 머리가 상투를 튼 것은 아닐까’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본 것은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관광 가이드에게 슬쩍 물어보았으나, 명확한 답을 듣지 못해 여행 내내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리우웨이의 『황제의 나라』 를 보면서 이 같은 의문은 역시 ‘필자의 생각이 맞았구나’하는 커다란 기쁨으로 돌변했다.

 

이 책에 따르면 “진나라 사람들은 6을 길한 숫자로 여겼다. 군사가 머리를 빗을 때도 먼저 머리카락을 세 가닥 또는 여섯 가닥으로 나누어 각각 변발을 땋은 다음 끌어올려 상투를 만들었다.

관모(冠帽)를 써야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상투 위에다 관을 썼다” 고 한다.

우리가 이 상투에 주목을 하는 이유는 화하족(華夏族)과 유목민은 상투를 튼 풍습이 없으며 상투를 틀어 올린 민족은 동이족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이후 옷차림에서부터 관모에 이르기까지 각 제후국들의 풍습을 다 받아들였음에도 유일하게 머리 모양만은 고유한 진의 전통을 따랐다고 한다.

 

상투는 남자가 성인이 된 하나의 표징이었으며, 1895년(고종 32년) 단발령이 내리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이니) 불감훼상(이)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라 하는 유교사상을 내세우고, 머리를 깎은 모습이 마음에 안들어 '까까중'이라고 하면서 거센 반발을 일으켰을 정도다.

 

이처럼 상투를 튼 풍습은 먼 옛날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내려온 동이족의 상징 풍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나라 사람의 풍습을 보존하고 있는 머리 모양은 곧 계급을 상징했다.

계급이 높은 사람은 관모를 썼다. 절운관(切雲冠)이라고도 불리는 갈관(冠)은 모양이 검은색 꿩 갈()의 꼬리를 닮았다. 북방인의 가죽 모자에서 유래했으며, 전국 시대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의 개혁을 거쳐 갈관이 되었고, 후에 진나라에 의해 모방되었다고 한다.

갈관을 쓴 사람은 가장 지위가 높은 장군으로 계급은 1만 명의 부대를 통솔하는 교위였다.

갈관 다음의 장관(長冠)은 남방의 초인(楚人)들이 즐겨 쓰던 관이었다.

후에 진의 군모(軍帽)가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장관은 개어 놓은 방건(方巾·명대에 문인이 썼던 두건)과 비슷했다.

높이는 약 15㎝이고 3급 또는 4급 작위의 중급 군관이 쓰던 것이다.

군관 가운데 하급 군관과 기병들은 주로 변관(弁冠)을 썼다.

변관에는 원형 식과 두건 식 두 종류가 있었다. 이처럼 관모를 쓰지 않은 군인들은 모두 여러 가지 모양의 상투를 틀었는데, 대개 지위가 낮은 사졸 또는 1급, 2급 작위의 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상투는 계급을 상징하였는데, 원뿔 모양의 상투를 정수리 뒤쪽으로 올리는 원뿔형 상투는 지위가 가장 낮은 사졸의 머리 모양이었다. 왼쪽으로 올린 원형 상투는 원형의 상투를 정수리 왼쪽으로 올린 것으로서 원뿔형 상투보다 지위가 약간 높은 사졸의 머리 모양이었다.

나아가 오른쪽으로 올린 원형 상투는 정수리 오른쪽으로 원형의 상투를 올린 것으로, 1급 작위(공사)의 머리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진시황을 떠올릴 때 ‘분서갱유(焚書坑儒)’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떠올린다.

그러나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한 이유가 자신과 동이족과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각종 문헌을 불태웠고, 만리장성의 축조가 동이족의 침략이 두려워 성을 쌓은 것이라면….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분서갱유는 유학을 없애고 유학자를 암매장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중국을 형성하고 있는 화하족의 뿌리가 되는 동이족의 역사를 없애기 위한 문화말살 정책일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우리의 역사는 단편적으로만 전해져서 뒤죽박죽인채 전혀 연결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中학계 "한자는 동이족 문자...한국만 몰라"

“우리나라 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1902~1999) 박사가 장관시절, 중국의 세계적 문호 임어당(林語堂, 1895~1976)을 만났을 때 여담처럼 말했죠.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우리 한국까지 문제가 많다’ 고요. 그러자 임어당이 놀라면서 ‘그게 무슨 말이오? 한자는 당신네 동이족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아직 모른단 말입니까?’라는 핀잔을 들었답니다.”

임어당의 일화를 소개한 진 이사장은 인사를 차릴 틈도 주지 않고 한자의 조기교육을 계속 강조해 나갔다. 1967년 대만에 유학, 국립사범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국립정치대학에서 1975년까지 교수로 재직. 그의 학위논문 [계림유사(鷄林類事)연구]의 ‘계림유사’는 송(宋)나라 학자 손목(孫穆)이 고려에 왔다가 고려언어를 수집 설명한 책으로 11세기 한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의 하나다.

중국 학자들이 고증

-한자가 우리 글이라는 근거를 좀 더 듣고 싶은데요.

“몇몇 한글 전용론자들이 연구 고증도 없이 한자는 중국 한족(漢族)이 만든 것이라고 규정해버렸습니다. 
우리 말의 뿌리와 기둥은 잘라 버리고 그 발음 표기(한글)만 가지고 표현하자니 무슨 뜻인지 모르게 된 꼴입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자(訓民正字)’가 아니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제정, 발음을 표준화 한 것입니다. 한자를 무작정 외국어 취급하는 것은 참으로 무지한 자폭행위가 되는 이유죠.

첫 째, 한자(漢字)라는 호칭은 중국 한족이 만들었대서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한나라 때에도 ‘한자’라는 명칭은 없었죠. 긴 역사를 논할 시간은 없으니 쉬운 예로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을 보면 [한자는 곧 한족인의 문자라는 말인데, 몽고문자와 대칭해서 말한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공식적으로는 원(元)나라때 몽고인들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몽고문자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입니다.

둘째, 한자는 오래전부터 동이족이 사용한 문자가 약 3천400년전 은(殷)나라때 ‘갑골문(甲骨文)’으로 발전된 문자입니다.
중국의 사학자 왕옥철(王玉哲), 장문(張文), 문자학자 이경재(李敬齋)등의 연구 고증에 따르면 <한자의 연원은 동이족 문화유산으로서 ‘중국의 문자는 모두 동이인(東夷人)이 창조’하였으며 공자(孔子)도 동이족 은나라의 후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자는 동이족이 자기 언어를 표기한 문자이며 진짜 우리 말 우리 글입니다."

 

중국의 삼황오제는 모두 동이족 (5부)
 
(삼황) 복희, 신농, 헌원 (5제) 소호금천, 전욱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순임금

중국의 삼황오제의 3황(皇)은 통상 태호복희(太皞伏羲)와 염제신농(炎帝神農)과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들며, 5제(帝)로는 소호금천(少昊金天),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 제순유우(帝舜有虞-순임금)을 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모두가 배달국의 후예 즉 동이족이라는 것이다.

 

  <태백일사>에 따르면 태호복희는 배달국 5대 태우의(太虞儀) 환웅의 12번째 막내아들이며, <사기>에도 동이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호복희는 신의 변화를 보고 팔괘도를 그리고, 갑자를 처음으로 하는 등 주역의 사상적 원조가 된다.

 

염제신농은 소호금천과 함께 고시씨(高矢)씨의 방계인 소전(少典)의 아들이라 한다. 소전은 배달국 8대 안부련(安夫連환웅의 말기에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했는데, 이 때 따라간 신농이 주변의 온갖 약초를 맛보고 동양의학의 시조가 되고, 태호복희의 여동생 여와(女娲)의 뒤를 이어 제후가 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그나마 동이족과 혈연적으로 거리가 있는 황제헌원을 자신들의 실질적인 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삼황의 마지막 황제헌원도 13대 사와라(斯瓦羅환웅 초기에 소전의 별고에 공손(公孫)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軒丘)로 유배시켰는데, 헌원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헌구는 헌원의 유웅국(有熊國)이 있던 하남성 신정(新鄭)현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오제인 소호금천은 헌원의 아들이며, 전욱고양은 손자, 제곡고신은 증손자, 요임금은 고손자가 된다.

 

오제의 마지막 순임금은 헌원의 자손이 아니라, 동이족인 장님 고수의 아들로 단군왕검의 신하였다. 천왕의 명을 받아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자 힘이 딸린 요임금이 생명을 보전코자 어쩔 수 없이 양위했다고 한다. 즉 현대적 표현으로 조선의 식민지인 중국의 총독인 된 셈이다. 맹자는 <이루장구 하>에서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죽으셨는데, 제풍·부하·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순임금은 동이족이 확실하다 하겠다.


  청나라 때 그려진 <대청광여도>라는 지도에 순임금이 죽은 명조(鳴條)라는 지명이 황하 북쪽에 있는 산서성 남부에 그려져 있다. 이 지역이 순임금이 요임금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다스리던 땅이었고, 실제로 그곳에 순임금의 무덤이 있다. 맹자가 말하기를 이곳이 동이족의 땅이라 했으므로 이 지역은 배달국과 조선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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