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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74 과연 무슨 이야기를 담을까?

by Progress posted Jan 1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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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호 PD의 차기작에 대한 언급으로 '현대사 중 1988년에 이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1974년이다.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초코파이의 첫 출시를 비롯해 국제적으로도 워터게이트 사건과 카네이션 혁명 등 굵직한 이벤트가 많았다.'고 말을 꺼냈다.

역사 스페셜을 이런식의 드라마로 구성한다면 참 좋겠다.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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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당시 영부인 육영수를 저격하여 살해한 사건이다.
육영수 여사는 사건 발생 9분만에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오전 11시경부터 신경외과 과장 심보성 교수의 집도로 오후 4시 20분까지 뇌수술을 받았다. 근처 병원과 적십자혈액원의 모든 AB형 혈액을 쏟아붓는 큰 수술이었는데, 400㎖ 혈액 148병이 수혈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몸속의 모든 혈액을 거의 10번은 갈아치울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육영수는 소생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총알이 우뇌의 가장 큰 정맥을 손상시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집도의는 사건 다음날 "꼭 살렸어야 했는데… 5㎜만 비켜 갔어도…"라며 침통해했다고 한다. 수술이 끝난 뒤,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와 회복실에서 약 20~30분 가량 육영수와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 육영수는 이날 오후 7시경에 숨졌다.

문세광이 사용한 권총이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사라진 것이라는 사실, 문세광이 소지했던 위조 여권을 발급한 것에 대한 책임, 문세광의 공범 중에 일본인이 끼어 있다는 사실 등으로 일본 정부는 법률적 내지,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본이 연관되어 있었던 정황이 보여 한일관계가 불편해졌으나, 일본정부가 책임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개선되었다. 그리고 9월 19일 집권당인 자유민주당 부총재인 시나 에쓰사부로가 수상 다나카 가쿠에이의 친서를 휴대하고 진사특사로 한국을 다녀갔다. 문세광은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를 받았으며 그해 12월 20일에 사형을 집행하였다.

한편 서울특별시장 양택식은 행사 책임자로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수도권 전철 1호선(首都圈 電鐵 一號線, Seoul Metropolitan Subway Line 1)은 대한민국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역과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역,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역, 경기도 광명시 광명역, 그리고 경기도 오산시 서동탄역 등을 잇는 수도권 전철의 운행 계통이다. 총 연장을 합산한다면 수도권 전철 노선 중 가장 긴 노선이다. 노선색상은 ●남색이다.

초코파이 출시

1974년 4월에 동양제과에서 처음으로 초코파이가 50원에 출시되었다. 
1983년에는 롯데제과, 1986년 해태제과, 1989년 크라운제과에서 각각 "초코파이"를 생산하였다. 
동양제과는 롯데제과에 상표등록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지만 기각되었고 1989년 기존의 본사 초코파이를 "초코파이 정"(情)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였고, 상표등록을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권력 남용의 정치 스캔들이었다. 
사건의 현장이 워싱턴 D. 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발생되어 유래한 것이다. 
닉슨은 미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지 4일 뒤인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이로써 그는 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임기 중 사퇴한 대통령이 되었다.

카네이션 혁명

1974년 4월 25일에 발생한 포르투갈의 무혈 쿠데타이다. 
포르투갈 내에서는 날짜를 따서 4월 25일 혁명(4·25 혁명, 포르투갈어: 25 de Abril)이란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40년 이상 계속된 독재정권인 살라자르 정권과 계속되는 식민지와의 전쟁에 대한 반발감으로 좌파 청년 장교들이 주도하여 발생하였다. 
카네이션 혁명이란 이름은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의 혁명군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지지의사를 표시한데서 비롯한다. 
이 혁명 이후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제외한 모든 해외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일괄포기하였으며, 정권은 군부의 과도정부를 거쳐 투표에 의한 민간정부로 이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