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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09.07.15 17:09

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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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요즘 드라마 선덕여왕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선덕여왕에 대해서 알아볼까한다.
우선 우리말의 상당부분은 한자로 되어 있고, 이 한자를 해석해보면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착하고 덕이 많은 여자 왕이다!
왕이 착하고 어질며 덕이 많다라는 이야기는 백성들을 그만큼 사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선덕여왕이 백성들을 생각하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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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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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신라 제 27대왕인데, 경주 김씨 족보에 따르면 선덕왕의 직계조상은 다음과 같다.

 

알지(閼智)-세한(勢漢)-아도(阿道)-수류(首留)-욱보(郁甫)-구도(仇道)-말구(末仇)-내물왕(奈勿王)-복호(卜好)-습보(習寶)-지증왕(智證王)-입종(立宗)-진흥왕(眞興王)-동륜(銅輪)-진평왕(眞平王)-선덕여왕(善德女王 김알지의 16세손)



 참고: 신라 제 1대-56대 왕들

혁거세왕(박씨)-남해왕(박씨)-유리왕(박씨)-탈해왕(박씨)-파사왕(박씨)-지마왕(박씨)-일성왕(박씨)-아달라왕(박씨)-벌휴왕(석씨)-내해왕(석씨)-조분왕(석씨)-첨해왕(석씨)-미추왕(김씨)-유례왕(석씨)-기림왕(석씨)-홀해왕(석씨)-내물왕(김씨)-실성왕(김씨)-눌지왕(김씨)-자비왕(김씨)-소지왕(김씨)-지증왕(김씨)-법흥왕(김씨)-진흥왕(김씨)-진지왕(김씨)-진평왕(김씨)-선덕여왕(김씨)-진덕여왕(김씨)_태종무열왕(김씨)-문무왕(김씨)-신문왕(김씨)-효소왕(김씨)-성덕왕(김씨)-효성왕(김씨)-경덕왕(김씨)-혜공왕(김씨)-선덕왕(김씨)-원성왕(김씨)-소성왕(김씨)-애장왕(김씨)-현덕왕(김씨)-홍덕왕(김씨)-희강왕(김씨)-민애왕(김씨)-신무왕(김씨)-문성왕(김씨)-헌안왕(김씨)-헌강왕(김씨)-정강왕(김씨)-진성여왕(김씨)-효공왕(김씨)-신덕왕(박씨)-경명왕(박씨)-경애왕(박씨)-경순왕(김씨)

 

 

태종무열왕의 직계조상

알지(閼智)-세한(勢漢)-아도(阿道)-수류(首留)-욱보(郁甫)-구도(仇道)-말구(末仇)-내물왕(奈勿王)-복호(卜好)-습보(習寶)-지증왕(智證王)-입종(立宗)-진흥왕(眞興王)-진지왕(眞智王)-용춘(龍春)-무열왕(武烈王-김춘추. 김알지의 16세손)

 


궁예의 직계조상

알지(閼智)-세한(勢漢)-아도(阿道)-수류(首留)-욱보(郁甫)-구도(仇道)-말구(末仇)-내물왕(奈勿王)-복호(卜好)-습보(習寶)-지증왕(智證王)-진종(眞宗)-흠운(欽運)-마차(摩次)-법선(法宣)-의관(義寬)-위문(魏文)-효양(孝讓)-원성왕(元聖王)-례영(禮英)-헌정(憲貞)-희강왕(僖康王)-계명(啓明)-경문왕(景文王)-궁예(弓裔-김알지의 25세손)

궁예의 형제들은 모두 왕이 되었다.

헌강왕(憲康王) 정강왕(定康王) 진성여왕(眞性女王)이 궁예의 형제들이다.

 


경순왕의 직계조상

알지(閼智)-세한(勢漢)-아도(阿道)-수류(首留)-욱보(郁甫)-구도(仇道)-말구(末仇)-내물왕(奈勿王)-복호(卜好)-습보(習寶)-지증왕(智證王)-진종(眞宗)-흠운(欽運)-마차(摩次)-법선(法宣)-의관(義寬)-위문(魏文)-효양(孝讓)-원성왕(元聖王)-례영(禮英)-균정(均貞)-신무왕(神武王)-문성왕(文聖王)-안(安)-민공(敏恭)-실홍(實虹)-효종(孝宗)-경순왕(敬順王 김알지의 28세손)

 


선덕여왕, 무열왕, 궁예, 경순왕의 계보를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증왕의 후손이란 점이다. 

지증왕은 500-514년 13년동안 신라를 통치했다.

재위 4년만에 국호를 신라로 확정했다.


사라ㅡ사로-계림-서라벌-신라 등으로 불리는 바람에 국호가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는데 

신라로 확정함으로써 국호의 통일성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는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져 사방을 덮는다"는 뜻이다.

왕에 대한 칭호도 거서간-이사금-마립간 등 족장을 의미하는 칭호를 '왕'으로 바꾸었다.


선덕여왕의 위기 극복 능력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즉위한 초반에는 왕권이 다소 불안정했습니다. 그래서 김유신을 발탁하여 국방, 김춘추∙김인문 부자로 하여금 내치와 외교를 담당하게 했지만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선덕여왕 11년(642) 7월 백제 의자왕에게 신라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겼는데, 이때 대야성(경남 합천)에서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이 백제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해 고구려로 원병을 청하러 떠난 김춘추가 첩자로 오인되어 옥에 투옥되었으며, 8월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신라가 당으로 가는 길목인 당항성(경기도 화성)을 차단하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김춘추는 구토지설(龜兎之設)로 고구려 보장왕을 현혹시키고, 감금에서 풀려나지만 고구려에 대한 청병(請兵)외교는 실패한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동북 아시아 최고 강대국으로 고구려와 쌍벽을 이루던 당과 오랜 친분을 유지하던 신라로서 그 당과 통하는 외교통로가 끊긴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9월 당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당 태종은 파병을 거부하고, '그대 나라(신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라며, 자신의 종친 한 사람을 보내 임금으로 삼겠다는 선덕여왕을 비하하는 발언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불쾌감을 참으며, 이듬해 정월에 당 태종을 달래는 사신과 방물도 보내지만 당 태종의 이런 언사는 신라의 진골 남성들을 부추겨 급기야 대신 비담과 염종은 군사를 일으킵니다. 여기서 선덕여왕은 최대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은 군대를 보내면 되고, 중국 황제의 발언은 그냥 비위를 맞춰 주면 되지만 신라 내부의 반란은 성격이 달랐습니다. 대외적인 위기는 신라 자체의 흥망이 좌우되는 것으로 나라 전체의 공감을 얻어 대처가 가능하지만 내부의 반란은 선덕여왕 자신은 물론이고, 김유신·김춘추 등 그녀 측근의 정치 생명과 개인적 생사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인데, 당시 신라 조정의 중심은 진지왕 계열에서 진평왕 계열로 넘어간 상황이고, 김유신은 가야 멸망 이후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실의 후손으로 둘 다 신라 조정에서는 비주류였습니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그러한 출신성분보다 그들의 재능과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중용한 것입니다. 이에 불만을 느낀 상대등 비담과 같은 귀족회의의 수장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 불안감과 충격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드디어 선덕여왕 16년(6470) 1월 봉기한 반란군은 명활성을 거점으로 월성의 왕족 세력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사망합니다.


게다가 흉조라고 믿는 유성이 월성 쪽에 떨어지자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했습니다. 이때에 김유신의 활약이 펼쳐집니다. 우선 그는 새로 즉위한 왕(진덕여왕)을 찾아가 안심시키고, 심야에 불꽃이 달린 연을 날려 보내며, 지난번에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립니다. 또한 김유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흰 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를 올리고, 반란군을 책망하는 축문(祝文)을 지어 바칩니다. 아주 주도면밀한 심리전인 셈입니다. 그리하여 반란군은 진압됩니다. 이렇듯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어서도 신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김유신과 같은 인물을 등용했는지도 모릅니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의 등극 과정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은 심각한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후계자를 지정해야 하는데, 마땅한 후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흔한 아들도 없는 데다가 왕족 김용춘(金龍春, 김춘추의 아버지)의 존재도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진평왕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25대 진지왕(眞智王)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차지했는데, 바로 자신이 내쫓은 진지왕의 아들 용춘이 어느새 세력을 키워 제법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용춘을 제거하기 위해 나름대로 책략을 발휘해 보기도 했지만 결국엔 용춘을 인정하기로 하고 자신의 딸인 천명(天明)을 주었습니다.


당시 진평왕에게는 세 명의 공주가 있었는데, 첫째가 덕만(德曼, 훗날의 선덕여왕), 둘째가 천명, 셋째가 선화(善花, 훗날 서동과 로맨스로 유명합니다)였습니다. 이 중 둘째인 천명을 용춘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은 덕만이 이미 유부녀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용춘을 견제하려는 진평왕의 의도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천명은 진평왕의 첩실인 승만부인 손씨의 소생입니다. 신라 역대 왕들을 살펴보면 탈해왕이나 눌지왕처럼 가끔 사위가 왕위를 이어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은 정비의 소생인 공주와 혼인을 했었고, 첩실의 소생인 옹주와 혼인해 왕위를 이어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진평왕은 용춘에게는 왕위를 넘기고 싶지 않았기에 생각해낸 일종의 비책인 셈입니다. 한편 이웃나라 일본에서 새로운 천황이 등극했는데, 누군가 하면 593년에 즉위한 일본 최초의 여자 천황 스이코(推古)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드디어 희망을 가집니다. 아들이 안 되면 딸도 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딸 셋 중 왕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맏이인 덕만이었습니다. 둘째인 천명은 어머니가 직계 왕족이 아니므로 성골이 아니지만 덕만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좀 있지만 그녀의 배우자도 성골인 음갈문왕 김인평이었습니다.


그러나 진평왕은 이러한 결심이 이제까지 전례가 없었던 여자의 왕위 계승을 신라 귀족사회가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차근차근 자신의 계획을 추진합니다. 우선 진평왕 44년에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창설하고, 담당자로 용춘을 임명했습니다. 원래 신라는 궁궐업무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총괄하여 내성사신에게 맡기고 그 책임자에 용춘을 앉힌 것입니다. 내성사신은 업무의 특성상 궁 내부 사정에 가장 밝아야 하며 왕족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요직입니다. 이것은 진평왕이 차기 왕좌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에게 회유와 견제를 동시에 제시한 일종의 승부수였습니다.


이에 용춘도 진평왕의 의도를 알았는지 이를 받아들이고, 다시 2년이 지난 진평왕 46년, 시위부(侍衛府, 왕실 친위부대)의 확대 개편하여 시위부가 아닌 시위군 수준이라 할 군사조직으로 만듭니다. 이는 여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세력을 잠재우기 위한 강력한 왕권 구축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진평왕에게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여자가 왕이 된다는 데에 역심을 품고 반란을 모의한다는 보고가 올라 온 것입니다. 진평왕은 이때다 싶은 마음에 확실하게 처단합니다. 특히 주모자인 칠숙은 구족(九族)을 멸할 정도로 아주 혹독하게 처벌하였습니다.


이렇게 까지 수고를 다한 진평왕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나지 않아 사망하여 마침내 덕만은 선덕여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칠숙과 석품의 역모는 말 그대로 딸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선덕여왕은 그냥 기다리다가 혹은 무심결에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평왕의 10년에 걸친 치밀한 계획에 의해 불만세력의 제거와 친위세력의 육성, 그 사이 신라 국정에 대한 정치수업도 같이 병행되어 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선덕여왕의 어질고 현명한 정치는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선덕여왕과 천명공주

친어머니 지도태후와 함께 궁중에서 자란 용수와 용춘은 어린 시절 진평왕을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 천명공주와 선덕공주도 같이 왕궁에서 자랐으므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용춘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선덕의 숙부였으나 신라사회는 친족간의 사랑이 금기가 되는 사회가 아니라 장려되는 사회였으므로 친족이란 사실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용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해 고민하던 천명공주는 어머니 마야왕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남자 중엔 용숙(龍叔)만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속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용춘이 용수의 동생이기에 ‘젊은 숙(叔)’자를 써서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마야왕후가 ‘용숙’을 ‘용수’로 잘못 알아듣는 바람에 서로의 운명이 꼬여갔다. 

마야부인에게서 이 말을 들은 진평왕은 용수를 사위로 삼고 왕위까지 물려주려 했다. 용수와 천명공주의 결합은 선왕의 혈통과 자기 혈통의 완전한 결합이기도 했으므로 아들이 없던 진평왕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천명은 기회를 엿보아 용춘에게 ‘첩이 본래 그리워 한 사람은 당신’이라고 고백했으나 용춘은 ‘가정의 법도는 장자(長者)가 귀한 법인데, 신이 어찌 형과 같겠습니까?’라며 구애를 거절했다. 

천명공주는 이에 좌절하거나 용춘을 원망하지 않고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용춘의 직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용춘은 13세 풍월주(風月主:대표 화랑)가 되어 골품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발탁으로 큰 업적을 이룩했다. 그러자 진평왕은 용춘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하고 천명공주에게 왕위를 양보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덕공주가 여기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녀는 남자만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시대의 상식에 도전했다. 그녀는 용춘에게 왕위를 양보하기는커녕 용춘이 자신의 사신(私臣: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신하. 여기에서는 남편의 뜻도 있음)이 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춘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대신 그를 사신으로 쓰겠다는 선덕의 당돌한 말은 진평왕을 감탄시켰다. 천명공주 같으면 상상도 못할 발상이었다. 진평은 선덕이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했겠지만 이 정도 배포라면 여왕노릇을 못할 것이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진평왕은 선덕의 요청을 받아들여 용춘에게 선덕을 받들라고 명령했다. 이는 선덕의 사신이자 남편이 되는 것을 뜻했다. 용춘은 사양했으나 임금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화랑세기’는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龍鳳)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을 갖게 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녀가 왕의 상징인 ‘용봉’과 ‘태양’처럼 된 것은 이런 발상의 전환과 노력의 결과였다. 여왕은 세 명의 남편을 둘 수 있게 하는 ‘삼서지제(三▩之制)’를 제도화해 용춘 외에도 흠반(欽飯)과 을제(乙祭)까지 남편으로 삼았다. 

천명은 양보함으로써 왕위와 용춘을 모두 놓쳤으나 선덕은 상식에 도전한 결과 왕위와 용춘을 모두 차지하고, 두 남자까지 더 둘 수 있었다. 선덕여왕은 이런 배포만큼이나 총명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의 기미를 미리 알아냈다는 내용의 ‘지기삼사(知幾三事)’가 실려 있는데, 첫 번째는 선덕여왕이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모란꽃엔 향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겨울철에 개구리떼가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라는 연못 부근에서 사나흘을 계속해서 울자, 서쪽 변방 여근곡(女根谷)에 백제군이 숨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격퇴시켰다는 것이다. 신하들이 어떻게 백제 군사가 숨어 있었는지 알았냐고 묻자 “개구리의 성난 모양은 병사의 형상이고 옥문은 여자의 음부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므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답한다. 이에 신하들은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세 번째는 자신의 죽을 날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당 태종은 선덕여왕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643년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백제연합군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군사지원을 요청하자 태종은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종친 한 사람을 보내 임금으로 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신라 사신은 묵묵부답이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내정간섭에 대한 불쾌감을 꾹 참고 이듬해 정월 사신과 방물(方物)을 보내 태종을 달랬다. 당 태종의 이런 여왕 비하 발언은 신라의 진골 남성들을 부추겨 나중에 비담(毗曇)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이외에도 선덕은 재위 11년(642년) 백제 의자왕의 공격을 받아 서쪽 변경 40여 성을 빼앗기는 등 내우외환을 겪었다. 그녀는 이에 맞서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산) 군주(軍主)에 임명해 백제의 공격에 맞서는 한편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 왜, 당에 파견해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그녀는 당에서 귀국한 자장법사(慈藏法師)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黃龍寺) 9층탑을 축조한 이유는 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고구려·백제)은 항복할 것이며, 아홉 이민족이 와서 조공(朝貢)할 것’이란 말 때문이었다. 이 통일염원탑의 제1층은 일본(日本), 제2층은 중화(中華)…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濊貊)을 진압시킨다는 뜻이니 천하를 제패하려는 선덕여왕의 웅대한 포부가 담긴 탑이었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난세(亂世)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평했으나 삼국 중에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객관적으로 선덕여왕 때 삼국통일의 기초를 세웠다. 그녀는 성공한 여왕이었다. 



용수가 죽으면서 형사취수(兄死取嫂)의 유풍에 따라 천명공주와 아들을 용춘에게 맡겼다. 천명은 비로소 꿈에 그리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용수가 사랑하는 부인과 우애 깊은 동생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했다.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한 천명은 용수가 죽음에 따라 비로소 그 사랑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랑세기’는 “(용춘)공이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선덕에게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용춘이 선덕에게 애정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한 승리자는 천명공주였다. 또한 선덕여왕은 자기 뒤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했다. 용춘이 다른 여자에게서 다섯 아들을 낳은 것으로 보아 문제는 선덕에게 있었다. 


신라에만 여왕이 있는 이유

신라 24대 진흥왕은 아들 두 명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동륜(銅輪)이며, 둘째가 금륜(金輪) 혹은 사륜(舍輪)인데, 동륜이 일찍 죽어 금륜이 등극하여 진지왕이 됩니다. 그런데 아직 논란이 끊이지 않는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에 따르면 동륜은 어느 날 밤, 궁궐 바깥에 살고 있는 진흥왕의 색공녀인 보명을 만나러 궁궐 담장을 넘다가 그만 커다란 사냥개한테 물려서, 다시 말해 광견병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찌 됐건 형이 죽는 바람에 왕이 된 금륜, 즉 진지왕은 불과 4년 만에 음란한 짓을 일삼는다 하여 쫓겨나고 죽은 동륜의 아들이 진평왕이 됩니다.


진평왕은 신라 왕 중에서도 가장 오랜 53년 동안이나 왕으로 있다가 서기 632년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평왕에게는 아들도 형제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성골 남자가 다하였다(聖骨男盡)'고 표현했으며, 성골로는 진평왕 딸인 덕만(德曼)공주가 남아 있었습니다. 진평왕에게는 덕만 말고도 덕만의 언니인 천명(天明)이라는 공주가 한 명이 더 있었으나 일찌감치 진지왕의 큰 아들인 김용수에게 시집을 가면서 왕궁을 떠났기 때문에 골품(品)이 성골보다 한 단계 낮은 진골(眞骨)로 떨어져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남자건 여자건 성골이 씨가 마르지 않는 한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으므로 덕만이 서기 632년 선덕(善德)여왕이 됩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왕이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학계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신라에 여왕이 탄생한 배경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왕족으로 진평왕의 맏사위이자 진지왕의 장자인 김용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폐왕의 자식이기에 신하와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엄연히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런 난제는 당시 신라사회를 지탱하는 신분제였던 골품제를 이해하면 간단히 풀립니다.


신라는 진골인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등극하기 전까지 왕을 포함한 지배층과 일반 백성 및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을 골품이라 해서 엄격한 신분구별을 했습니다. 왕을 비롯한 최고 지배층이 성골이며, 중앙 고위관직을 차지한 다음 지배층이 진골이었고, 그 밑이 6두품, 5두품, 4두품이라 해서 세분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최고 지배층이 주로 왕의 형제들이었으므로 성골은 왕을 중심으로 그 형제 및 가족들로 구성되며, 새로운 왕이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성골집단이 생겼습니다. 또한 성골신분을 유지하려면 왕궁에 살고 있어야 하며, 왕궁을 떠나면 진골로 신분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같은 딸이었지만 장녀인 천명이 왕이 되지 못했던 까닭은 진평왕이 죽기 전 진지왕의 아들이면서 김춘추의 아버지가 되는 김용수에게 시집가면서 왕궁을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김용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진평왕이 죽었을 때 궁궐 안에 남아있던 성골은 남자는 다 없어지고 오직 덕만이 남은 것입니다. 더불어 신라 골품제, 특히 성골이 가진 결함도 여왕 탄생의 배경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성골이 될 수 있는 자격이 너무 엄격하다 보니 언제든 성골이 씨가 마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평왕이 아들과 형제 없이 죽었을 때에 나타난 것입니다.


어떻든 성골 남자가 없는 가운데 왕이 된 선덕여왕은 재위 15년 만인 서기 647년 비담과 염종이라는 자가 일으킨 난의 와중에 숨을 거둡니다. 다시 여기서 왕위를 놓고 같은 문제가 반복됩니다. 성골 남자는 없고, 선덕이 세상을 떠났으니 다른 성골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만약 없으면 진골이 왕이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런데 선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신라 왕궁에는 또 다른 성골 여성이 있었습니다. 진평왕의 모제(母弟)인 갈문왕 국반의 딸 승만(勝曼)인데, 그녀는 등극하여 진덕(眞德)여왕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은 아무리 성골이라 해도 여성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하는 점입니다. 


신라는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모든 권리가 계승되는 부계사회는 맞지만 여성 또한 1대에 한하여 아버지가 갖는 권리, 예컨대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며, 그 신분이 왕이 될 수 있는 성골인 경우는 더욱 강화됩니다. 이렇게 해서 선덕과 진덕여왕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덕여왕까지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는 남녀를 불문하고 성골은 정말로 씨가 말라 버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진골 중에서 왕을 찾게 되었는데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축출되면서 신분 또한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진 김춘추가 김유신의 무력을 등에 업고 왕이 되니 이로써 신라는 진골왕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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