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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상식
2011.11.26 17:49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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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진짜 이유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중 p231~252, 한국사 편지3 p34~40 참고)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의 위인들 중 한 명이다.


아니, '위인들 중 한 명'정도가 아니라 '위인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세종대왕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또 그만큼의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친숙함? 일단 당장 지갑에서 초록빛을 띈 아름다운 종이 한 장만 꺼내보아라. 그러면 알 것이다. 세종대왕이 친숙한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바로 그 이유를. 그리고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지금 사람들이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를 말이다. 세종대왕이 쌓은 업적을 말하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일단 한글 창제라 하겠다(그 밖의 업적은 이상적인 유교정치의 구현, 국토 개척과 국력 신장, 집현전 설치, 과학과 예술을 발달시킨 것 등이 있지만 여기서는 넘어가자).


실제로도 한글 창제는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세종대왕의 업적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가 백성들의 편리를 위해서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한글이 배우기 쉽다. 이 말은 배우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다른 나라의 언어에 비해서 비교적 짧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론적으로 문맹인 사람의 수가 적다는 것에 도달한다(실제로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0.어쩌고저쩌고....%, 세계 1위란다).


게다가 유네스코가 세계 각국에서 문맹퇴치사업에 가장 공이 많은 개인이나 단체를 뽑아 매년 시상하는 문맹퇴치 공로상의 이름이 세종대왕 문해상이라니, 말 다한 거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인기를 얻은 세종대왕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20대부터 두통과 이질을 앓았고, 30대에는 풍병과 종기로 고생을 했다. 40대에는 백내장, 당뇨병, 전립선염, 각기병, 고혈압 등 갖은 질병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의 고통은 병 뿐만이 아니었다.


즉위하기 전 그의 아버지였던 태종은 외척이 세도를 부려 왕권을 약화시킬까 우려해, 세종의 어머니 원경왕후의 형제들인 민씨 4형제를 모두 역모죄로 몰아 죽이고,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으로 있던 심온 또한 역모죄로 죽이고 가문을 문닫게 했다. 이 모든 일을 세종대왕은 감수성이 한참 예민한 10대 후반에 겪어야만 했다. 즉위하고 나서도 먹구름은 물러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어둡게 끼인 것인지, 그는 왕이 되고 나서 바로 세 차례의 국상을 맞았다. 즉위한 해에 큰아버지인 정종이 죽었고, 정종의 3년상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머니, 아버지가 잇달아 숨졌다. 무려 7년간을, 그것도 즉위하자마자 바로 연달아서 상중에 있었던 것이다. 이 7년 동안 그는 술과 기름진 고기를 멀리하였으며, 100일 넘게 곡을 하고, 36차례가 넘는 제사에 참여했다. 분명 스트레스와 과로, 영양부족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18시간 이상 업무를 보고, 토론하고, 공부를 했다. 게다가 세종대왕은 자식복도 며느리복도 없었다. 맏딸인 정소공주는 13세에,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은 20세에,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은 19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자식 사랑이 끔찍했던 그였으니,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맏며느리도 셋이나 봐야 했다. 첫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세자가 자신을 찾지 않자 '압승술'이라는 민간비방을 썼다. '압승술'은 남편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을 태워 가루를 내, 그것을 술에 타 남편에게 먹이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행각이 발각돼 휘빈은 폐빈되었다. 두번째 세자빈 순빈 봉씨는 낮술을 즐겨 마신 데다, 소쌍이란 여종과 동성애에 빠져서 동침을 일삼았다(앞에 글자색은 하얀색입니다. 쌤이라면 보셔도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보지 마시길. 참고로 책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임). 시아버지로서 차마 밝히기도 부끄러운 이런 음행을 알고 난 뒤 그는 마음고생 끝에 결국 순빈 봉씨를 폐빈하고 새로운 맏며느리를 들였다. 이렇게 많은 고통을 겪은 그가 과연 정말로 백성들의 편리를 위해서라는 목적으로만 한글을 창제하였을까?(여기서 굳이 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아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를 말한 이유가 나온다)


왠지 나라도 안 그럴 것 같다. 힘들어서 남 생각할 겨를도 없지 않을까? 뭔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하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백성들의 편리를 위해서라고 소문을 내 민심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진짜 목적은 정말 따로 있었다. 그가 조선의 왕이 되었을 당시, 고려는 멸망하고 나라는 바뀌어서 조선이라는 새 나라가 되어 유교(정확하게는 성리학)을 나라의 근본 사상으로 삼았지만, 아직까지도 백성들은 불교에 따라 생활하고 있었다. 나라는 조선이었건만 백성들은 아직도 고려의 백성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왕들은 이 점을 확실하게 바꿔 놓아야 했다. 그럴려면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백성들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럴려면 유교를 설명해 놓은 유교 경전 등의 내용을 백성들에게 알려줘야 했는데, 그때 당시 쓰던 한자는 빠른 시간 내에 많은 백성들에게 가르치기가 불가능했다. 또한 당시 한자를 안다는 것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뚜렷히 구분하는 경계였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한자를 가르쳐주다가는 그 경계가 위험해지기 때문에 더욱 안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백성들을 글자도 모르는 상태로 놔두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결코 이롭지 않으며, 백성이 글자를 모르면 오히려 왕 자신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명령한 것을 써 붙인 방이 담고 있는 내용을 백성들이 알지 못하면 큰일이었다. 말로 한다 해도 그것이 왜곡되고 과장되어져 백성들에게 전달된다면 문제가 아닌가. 뭐, 사대의 필요성 때문이기도 했다.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명에 대해 사대의 예를 갖추는 것을 중시했다. 그러기 위해선 명의 언어를 정확히 배워 정확히 구사해야 했다. 당시 한자는 똑같은 글자를 놓고도 서로 다르게 발음하여 혼란을 일으킬 때가 많아, 한자음을 하나로 통일할 필요성이 매우 강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후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은 지극히 옳고 당연한 일이었다는 내용을 담은<용비어천가>를 최초로 한글을 써서 간행했다. 또한 유교 경전의 여러 내용을 해석한 책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운회>라는 중국 책을 번역할 때에는 한글이 한자음을 읽는 발음 기호로 표기되어 있었다. 한자음을 정확히 배우기 위한 보조수단으로도 한글이 쓰인 것이다.




비록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진짜 이유가 백성들의 편리가 아니었더라도, 그의 한글 창제는 과학적이고 우수한 언어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칭송받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한글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쓰고, 듣고, 말하는 언어는 매우 어려워졌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쉬운 한글을 만들어서 언어를 배우는 아이들의 행복도 구한 셈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가 위인인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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