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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철학
2017.05.28 14:45

동이열전(東夷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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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삼국지_동이전.jpg

 

중국의 위(魏)․촉(蜀)․오(吳) 3국의 정사(正史)인 《삼국지》(三國志)는 서진의 진수가 쓰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내용을 보충한 중국 삼국시대의 사찬(私撰) 역사서이다. 

 

후한 말기부터 서진 초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기》, 《한서》, 《후한서》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리며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의 하나이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txt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烏丸), 선비(鮮卑),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동옥저(東沃沮), 읍루(挹婁), (濊), (韓), (倭)

 

부여전(夫餘傳)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다. '현토'에서 천리를 간다. 남으로 '고구려'가 있고, 동쪽으로 '읍루'가 잇으며, 서쪽으로 '선비'가 있다.

 

북쪽으로 '약수'가 있으며, 가히 이천리이고 호수는 팔만호이다.

 

그 백성은 토착생활을 하고, 궁실과, 창고, 감옥이 있으며, 산과능선이 많으며, 연못이 넓으니, 동이의 지역중에 가장 평평하다.

 

흙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과격하고, 크다.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삼갈 줄 알고, 후덕하니 도둑질 하지 않는다.

 

나라에 군옹이 있고, 모두 여섯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명하니,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 가 있다.

 

읍락에는 호민이 있는데, 신분이 천한 사람들을 모두 노비로 하였다. 여러 '가'의 주인은 각각 사방을 다스리는데, 도가 큰자의 주인은 수가 천집이고 작은자는 백집이다.

 

음식을 먹음에는 모두 조두를 사용하고, 여럿이 모이는 때에는 서로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마시며,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출입한다.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 이를 '영고'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가둠이 없고, 죄인들을 풀어준다.

 

나라에서 옷에 흰색을 숭상하여, 백색 옷에 소개가 넓고, 도포와 바지가 있다. 신발은 가죽으로 한다. 나라에서 나갈때는 비단옷을 입기를 숭상한다.

 

성인은 여우, 원숭이, 흑색담비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전할 때는 모두 꿇어 손을 땅에 대고, 조용히 말을 한다.

 

 

 

 

후한서(後漢書)》 이후 중국의 역대 정사들은 열전 부분에서 〈동이전〉이나 기타 이민족의 열전을 편성하고 그 안에서 동이의 역사를 독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이전에 기록된 종족들은 한민족에 해당하는 여러 종족을 비롯하여 왜·말갈·유구 등이며, 주로 한민족의 기록이 중심이 되었다.

  • 후한서》(後漢書)제85권 〈동이전〉은 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 등 한민족의 원류를 형성한다고 여겨지는 여러 종족들을 다루어 한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후한서에서 구이라 하면 견이(獻夷), 어이(於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풍이(風夷), 양이(陽夷)를 칭하고, 이확(爾霍) 이순(李巡)의 주(註)에는 현도(玄莵), 낙랑(樂浪), 고려(高麗), 만식(滿飾), 부유(鳧臾), 소가(素家), 동도(東屠), 왜인(倭人), 천비(天鄙)를 칭한다.[5]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제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은 동예부여고구려옥저를 동이에 해당하는 항목에서 서술하고 있다.
  • 진서》(晉書)97권 〈사이전〉(四夷傳)에는 동이 항목에서 부여국마한진한숙신씨(肅慎氏), 왜인(倭人) 등을 서술하고 있다.
  •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위서》(魏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등 남북조 시대의 사서들에도 각기 〈동이전〉, 〈이만전〉(夷蠻傳), 〈동남이전〉(東南夷傳) 등이 편성·기록되어 있다.
  •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특이사항으로는 이전의 정사에서 일반적으로 동이로 취급되던 말갈이 북적으로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있다.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공자가 구이(九夷)에서 살고 싶다고 한 ‘동방을 이(夷)라 일컫는다.’

 

옛날 요(堯)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에 자리잡게 하여 양곡(暘谷)이라 했는데 아마도 해가 뜨는 곳이다.

 

무을(武乙-28번째 임금) 때 은나라는 쇠약해지고 동이(東夷)가 점차 번성하여 마침내 회(淮), 대(岱)로 옮겨와 중국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1.txt

 

공빈(孔斌)이 기록하였다는 <동이열전>의 원문과 번역문

공자의 7대 후손으로 알려진 공빈(孔斌)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약2300년전) 사람으로 위(魏)나라의 재상이었다고 합니다. 

공빈(孔斌)은 일반책에서 찾기가 어려운데 그것은 그가 젊은 시절의 공겸(孔謙)이라는 이름을 노년에 공빈(孔斌)으로 고쳤기 때문입니다. (史記 참고)


東夷列傳 全文

東 夷 列 傳 (註 檀奇古史 附錄)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 
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稱之, 
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 
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 
余亦欲居東夷之意 
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 
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 與吾中華 相有友邦之義 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

吾先夫子 印夷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 故余亦有感而記實情以示後人焉

魏 安釐王 十年 曲阜 孔斌 記 (字 子順) 

 

동방에 오랜 나라가 있으니 이름하여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별자리 분류로는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방향(동북방)이며, 땅은 선백(鮮白)에 접해 있었다. 

선백(鮮白)은 선비(鮮卑)


 처음에 신인(神人 : 道를 통한사람) 단군(檀君)있었는데 마침내 아홉 이족(九夷) 의 추대에 응하여 임금이 되었으?요(堯)임금과 더불어 병립하였다.

 

 순임금(虞舜)이 동이(東夷)에서 태어나서 중국에 들어와 천자가 되어 다스리기에 이르니 많은 왕들 중에서 탁월하게 뛰어난 분이셨다.

 

자부선인(紫府仙人 : 동이족의 선인)이 학문에 통달하고 다른 사람보다 지혜가 있으니 황제 헌원이 그에게서 공부하고 내황문을 받아와서 염제 신농씨 대신 임금이 되었다.

 

소련과 대련(동이족으로 공자선생등이 '효경'등 에서 언급이 자주 되는 인물)이 부모의 상을 잘 치뤄 3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3년을 근심하니 나의 할아버지께서 칭찬하셨다.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도산(塗山)에서 회맹(會盟)할 때에 부루(扶婁)께서 몸소 임하시어 나라의 경계를 정하였다.

 

유위자가 하늘이 낳은 성인으로 훌륭한 이름이 중국에도 넘쳐 흐르니 이윤이 그 제자로 공부해서 은나라(동이족왕조) 탕임금의 어진 재상이 되었다.

 

 그 나라는 비록 크나 스스로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 병력은 비록 강하나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으며, 풍속이 순후(淳厚)하여 길을 가는 사람이 양보하고 먹는 사람은 밥을 상대에게 권했었고 남녀가 처하는 곳을 달리하여 앉은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니  동방예의의 군자국(東方禮儀之君子國)이라고 할 만 하다.

 

 이런 연유로 은나라 태사(太史)였던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조정에서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어서 동이(東夷)의 땅에 피해 가서 거처하였고 우리 선대 어른(공자)께서 동이에 거처하고자 하셨으며 누추하지 않다고 여기셨다. 내 친구 노중련(魯仲連) 역시 동쪽 해안 지방을 답사할 뜻을 가지고 있고 나도 역시 동이에 거처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왕년(往年)에 동이의 사절이 (우리나라 즉, 魏나라에) 입국하는 것을 살펴보니 그 몸가짐이 대국인(大國人)의 금도(衿度)가 있었다.

 

동이는 대개 천 여 년 이래로부터 우리 중화(中華)와 서로 우방의 의리가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서로 와서 거처하고 가서 사는 경우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우리 선대 어른께서 동이가 누추하지 않다고 여기신 것은 그 뜻 역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깊이 느낀 바가 있어 이 진상을 기록함으로써 후인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bc268년) 곡부(曲阜) 공빈(孔斌)이 기록하다. (자(字), 자순(子順))

 

* 이 내용은 단기(檀紀) 4283년(서기 1950년)에 경찰교양협조회(警察敎養協助會)에서 간행한 발해국 대야발(大野勃) 저, ≪단기고사(檀奇古史)≫의 164쪽 <부록>에 실려있습니다.


홍사(鴻史)서문 

위 글은 홍사(鴻史)라는 책의 서문으로 쓰여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즉, 단기고사(檀奇古史)에 부록(附錄)으로 실리기 전에 먼저 홍사(鴻史)라는 책의 서문으로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bc268년)이라는 시기까지 똑같은 것으로 봐서 단기(檀紀) 4283년(서기 1950년)에 경찰교양협조회(警察敎養協助會)에서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발행할 때 누군가 홍사(鴻史)라는 책을 참고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홍사(鴻史)는 민족역사학자 송호수박사님이 소장하고계시는 책으로 어떤분이 올바른 우리역사를 밝히는데 사용해 달라고 기증한 책이라고합니다. (저서 "한겨레의 뿌리 길" 참고)

 

내용은 똑같고 출전만 틀리게 동국열전(東國烈傳)으로 되어있다고합니다.
 

 

《동이열전(東夷列傳)》- 공빈(孔斌 : 공자의 7대손)

공빈(孔斌)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약2300년전) 사람으로 위(魏)나라의 재상이었다고 합니다. 공자의 후손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공빈(孔斌)은 일반책에서 찾기가 어려운데 그것은 그가 젊은 시절의 공겸(孔謙)이라는 이름을 노년에 공빈(孔斌)으로 고쳤기 때문입니다. (史記 참고)

 

홍사--<<동이열전>> 의 내용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 
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稱之, 
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 
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 
余亦欲居東夷之意 
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 
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 與吾中華 相有友邦之義 
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 
吾先夫子 印夷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 
故余亦有感而記實情以示後人焉 
魏 安釐王 十年 曲阜 孔斌 記

--해석--

"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라 한다. 훌륭하신 단군(檀 
君)이 계셨는데 구이(九夷:동이9족)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요 
임금 때의 일이다.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동이의 나라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배달 
국 제14세 치우환웅 당시의 선인) 이라는 도통한 분이 계셨는데 '황제 
헌원(중국인의 시조)' 씨가 그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웠다" 

"그는 '염제신농' 씨의 뒤를 이어 중국의 임금이 되셨다. 중국의 고대 
나라인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의(塗山會議)'에 동이의 부루(夫婁:단군 
조선 제2세 단군)께서 친히 와서 나라의 경계가 정해졌다. 동이인 유 
위자(有爲子:제13세 흘달 단군 당시의 선인)는 하늘이 내신 성인인데 
그분에게서 '중국'이라 하는 이름을 얻었고 이윤(은나라 건국공로자)이 
그 문하에서 배워서 은나라 탕임금의 현명한 신하가 되었다" 

"동이는 그 나라가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박하고 후덕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 
들이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함부로는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방예의군자국'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은나라 
기자(箕子)가 주나라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땅(단군조선)으로 갔다" 

"나의 할아버지 공자(孔子)께서 동이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나의 
벗 노중련도 동이로 가고 싶어한다. 나도 역시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 
예전에 동이의 사절단이 온 것을 보니 대국인다운 모습이었다. 동이는 
대강 천년 이상 전부터 중국과 우방이었으며 사람들이 서로 왕래했다. 
위나라 安釐王 10년 곡부에서 공빈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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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鴻史)-동이열전 
홍사(鴻史)-지은이:지광한(池光翰)

생몰년대 : 1695(숙종21)∼1756(영조32)

출생지 : 충북 청주 와송리

 

조선후기의 학자. 자(字)는 휘보(輝甫), 호는 설악(雪嶽), 본관은 충주, 1695년(숙종 21년) 을해(乙亥) 정월 19일 인시(寅時)에 청주(淸州) 와송리(臥松里)에서 출생(出生)하였다. 7세에 소학(小學)을 그 선친(先親)에게서 배우고 9세에 벌써 문리(文理)가 통(通)하여 사략(吏略) 칠권(七卷)중 시(詩)·부(賦)·책(策) 등 문장(文章)을 쉽사리 풀이하니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16세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두루 섭렵하고 주역(周易)을 읽는데 어머니 이씨(李氏)가 병(病)이 들어 공이 시약(侍藥)을 함에 효성을 다하였다.

 

17세가 되어서는 서전(書傳)을 천독(千讀)을 하고 의방서(醫方書)를 읽어 약방문(藥方文)을 내어 손수 지어 봉양하기도 하였다. 1712년(숙종38년) 임진(壬辰)에 송씨가문(宋氏家門)과 혼인(婚姻) 하였으니 이 때 공(公)의 나이 19세였다. 21세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23세 때는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이듬해 24세 되던 2月에 아버지 궤연( 筵)을 모시고 문의(文義) 신지(新池)로 이사하여 집이 극빈한 까닭에 땔나무를 하러 가는데도 책을 끼고 가고 하는 것을 본 나무꾼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34세때 청주병영(淸州兵營)을 지내다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과 더불어 시율(詩律)을 지으며 읊고 조금 그곳에서 머물었는데 1728년(영조4년) 3월 15일 이인좌(李麟佐) 적변(賊變)이 일어나(戊申政變) 조정에서는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보내어 토벌하는데 이봉상(李鳳祥)과 남연년(南延年)도 참여하여 살해되었다. 이 일을 당한 공(公)은 왕록(王綠)은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때 몸만 빠져 나와 집에 돌아와서 가묘(家廟)을 땅에 묻고 처자를 거느리고 산중(山中)에 들어가 피난하였다가 5월에 아산(牙山)에 가서 이봉상(李鳳祥) (시호 忠愍)에게 제향(祭享)하였다. 1731년에는 함안(咸安)의 안인촌(安仁材)으로 이사하여 홍사(鴻吏; 史의 오타가 분명)를 지었다. 혹은 지씨홍사(池氏鴻史)라고도 하는데 반고(盤古)에서부터 명(明)나라까지 제왕통기(帝王統紀) 16편(編) 열전 32편(列傳 32篇) 등이다. 

지광한(池光翰)의 홍사(鴻史) 서문 에 
공빈(공자의 7대손)이 썼다는 동이열전의 서문을 썼다는 내용을 인용함.

홍사의 소재-현재 두곳
소재-- 1-군산대 박물관

2- 역사학자 송모씨가 가지고 있다고 함

 

 


(이건 필사본인듯)

 

홍사(鴻史) 이책은 

중국 안리왕(위나라 제7대왕) 10년, 
즉 서기전 267년 공자(孔子)의 7세 후손인 공자순(孔子順)이 서문을 쓴 책으로 

발해 대야발이 단기고사의 서문을 쓴 시기가 서기 729년이므로 무려 단기고사보다 996년전에 서문이 쓰여진 책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참고바랍니다 


< 홍사(鴻史)서문 > 


동방에 나라가 있었으니 가로되 동이라 별의 분포로서는 기미(箕尾)이고 땅은 선비(鮮卑)에 접해 있었다 

처음에 단군신인(檀君神人)이 있어 드디어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니 요(堯)와 더불어 나왔다 

우순(虞舜)이 동이에서 났으니 포의자(浦衣子)로부터 수학(受學)하였다 

중국에 들어와서 천자가 되어 백왕을 뛰어 넘는 정치를 했다. 
광성자(廣成子)는 남보다 월등한 지혜의 도학(道學)이 있어 황제(황제)가 그의 내문(內文)을 받아 요제(堯帝)에게로 그 대를 이은 임금이었다 

소련(少連) 대련(大連)이 거상(居喪) 석달을 게으르지 않고 피눈물로 3년을 잘했으니 나의 부자(夫子 = 孔子)가 착하다고 칭찬했다 

하우(夏禹)와의 도산회의(陶山會議)에서 부루사자(扶婁使者)를 보내어 국경을 정하였다 

유위자(有爲子)는 한얼이 낸 선인으로서 그 빛나는 이름이 중국에 넘쳤다. 
이윤(李尹)이 그 문중에서 수학하였다 

은나라 탕(湯)이 이윤을 불러 현인(賢人)을 물으니 


동방을 가르쳐 

- 그 나라는 국세가 크지만 교만하지 아니하고 
- 그 나라는 군사가 강하나 침략하지 아니하며 
- 그 나라는 풍속이 어질어 가는길을 양보하고 
- 그 나라는 배곺은 사람에 밥을주어 안굶기며 
- 그 나라는 남녀가 거처를 달리하여 유별하고 
- 그 나라는 남녀가 자리를 한테하여 안앉으니 

가히 예의 바른 동방의 군자국이다 

이런고로 은태사(殷太師) 기자(箕子)도 주(周)나라에 신하 될 마음이 없고, 동이(東夷) 땅으로 피해 살았다 

나의 선조인 부자(夫子 = 孔子)도 더럽지 아니한 동이에 살고자 했다 

나의 벗 노중연(魯仲連)도 또한 동해(東海)를 밟고져 하는 뜻이 있었다 
나 또한 동이에 살고 싶은 뜻이 있다 
지난해 동이 사절의 입국하는 그 늠름한 모습을 보았는데 과연 대국(大國)다움의 금도(襟度)가 역력하였다 

대저 동이는 수천여년 이래로 우리 중화와 우방의 우의가 있었다 
백성들이 서로 가서살고, 와서 살아 접하는 기회가 끊이지를 않았다 

나의 선조 공부자(孔夫子)께서도 동이가 더러운 곳이 아니라고 한 그뜻이 여기에 있었다. 고로 나또한 여기에 있었다 

고로 나 또한 느낀바 있어 그 실정을 기록하여 뒷 사람에게 보이고져 한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주(周)나라 난왕(난王) 47년 癸巳也) 

곡부(曲阜) 공자순(孔子順) 기(記) 
- (出 東國烈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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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 기미(箕尾) 

동북간방(東北間方)을 의미함. 
두 별의 이름 곧 기수(箕宿)와 미수(尾宿)를 말하는데 기주(冀州)와 유주(幽州)가 기미에 해당(별의 호칭에서는 "수", 잠을 잔다는 뜻으로 "숙"으로 발음함) 


(2) 안리왕 : 위나라 제7대왕 

안리왕 10년은 서기전 267년에 해당되고 발해 대야발이 단기고사의 서문을 쓴 서기 729년보다 996년전이니까 단기고사보다 거의 1000년전의 공자 약 7세 후손의 글이다 

(3) 난왕 : 주나라 제37대왕 

(4) 공자순의 이 글이 "홍사" 서문으로 되어 있다

 

출처인용-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no=11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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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鴻史)-지은이:지광한(池光翰) 에 대한 자세한 설명

조선후기의 학자. 자(字)는 휘보(輝甫), 호는 설악(雪嶽), 본관은 충주, 1695년(숙종 21년) 을해(乙亥) 정월 19일 인시(寅時)에 청주(淸州) 와송리(臥松里)에서 출생(出生)하였다. 7세에 소학(小學)을 그 선친(先親)에게서 배우고 9세에 벌써 문리(文理)가 통(通)하여 사략(吏略) 칠권(七卷)중 시(詩)·부(賦)·책(策) 등 문장(文章)을 쉽사리 풀이하니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16세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두루 섭렵하고 주역(周易)을 읽는데 어머니 이씨(李氏)가 병(病)이 들어 공이 시약(侍藥)을 함에 효성을 다하였다.

17세가 되어서는 서전(書傳)을 천독(千讀)을 하고 의방서(醫方書)를 읽어 약방문(藥方文)을 내어 손수 지어 봉양하기도 하였다. 1712년(숙종38년) 임진(壬辰)에 송씨가문(宋氏家門)과 혼인(婚姻) 하였으니 이 때 공(公)의 나이 19세였다. 21세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23세 때는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이듬해 24세 되던 2月에 아버지 궤연( 筵)을 모시고 문의(文義) 신지(新池)로 이사하여 집이 극빈한 까닭에 땔나무를 하러 가는데도 책을 끼고 가고 하는 것을 본 나무꾼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34세때 청주병영(淸州兵營)을 지내다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과 더불어 시율(詩律)을 지으며 읊고 조금 그곳에서 머물었는데 1728년(영조4년) 3월 15일 이인좌(李麟佐) 적변(賊變)이 일어나(戊申政變) 조정에서는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보내어 토벌하는데 이봉상(李鳳祥)과 남연년(南延年)도 참여하여 살해되었다. 이 일을 당한 공(公)은 왕록(王綠)은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때 몸만 빠져 나와 집에 돌아와서 가묘(家廟)을 땅에 묻고 처자를 거느리고 산중(山中)에 들어가 피난하였다가 5월에 아산(牙山)에 가서 이봉상(李鳳祥) (시호 忠愍)에게 제향(祭享)하였다. 1731년에는 함안(咸安)의 안인촌(安仁材)으로 이사하여 홍사(鴻吏)를 지었다. 혹은 지씨홍사(池氏鴻史)라고도 하는데 반고(盤古)에서부터 명(明)나라까지 제왕통기(帝王統紀) 16편(編) 열전 32편(列傳 32篇) 등이다. 

1734년(영조10년) 공(公)이 40세 되던 해 진양(晋陽), 사천(泗川) 등지에 돌아다니며 유림시객(儒林詩客)들과 교유(交遊)하다 함안(咸安) 집으로 돌아와 자호(自號)하기를 또 대충와(大蟲窩)라고도 하였다. 공(公)은 대충와(大蟲窩) 이외(以外)에 「醉隱寯」·「醉隱翁」·「雪樓子」·「隱求菴」·「雪嶽」 등으로도 쓰인다. 43세때는 현풍현(玄風縣)으로 이사하여 서당을 꾸미고 士子들을 가르치었다. 이 때 기전첩록(紀傳捷錄) 편술하였다. 1742년(영조18년) 임술(壬戌) 공(公)이 48세 되던 해에 문의(文義)청주(淸州) 등지 선산(先山) 묘소(墓所)에 성묘(省墓)하고 공주(公州)의 한적동(寒寂洞)으로 이사하여 이르기를 "가난한 선비는 글 읽고 농사질 따름이다." 라고 하며 손에는 늘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다음해에 대전(大田) 송촌(宋村)에 운평(雲坪) 宋선생을 만나보고 난 뒤에는 경의(經義)를 묻고 하여 49년동안 공부했으나 모두 그릇된 점을 깨달았으며 서로 시(詩)를 강마(講磨)하였다. 53세 때는 지씨가훈(池氏家訓)과 자림(字林)을 저술했고 이듬해에는 소학조례(小學條例)와 절주음(絶酒飮)을 지어서 이때 자호(自號)를 설루자(雪樓子)라 하였으니 이는 앵화설월(鸚花雪月)이란 뜻이라 한다. 

그후 아들을 운평(雲坪)에게 보내서 글을 배우게 했으며 운평(雲坪)과 자주 접촉하여 예문(禮文)을 연마하였다. 1754년(영조30년) 갑술(甲戌)에 공(公)의 나이 60이었다. 이 해 겨울에 남쪽으로 여행하다 대설(大雪)을 만나니 가야산(伽倻山)에 올라 주자(朱子)의 설시(雪詩) 천여운(千餘韻)을 감상하고 자호(自號)하기를「설악(雪嶽)」이라고 하였다. 이 때 설악전(雪嶽傳)을 자술(自術)하였다.

1756년(영조32년) 병자(丙子) 7월 4일 사시(巳時)에 졸(卒)하니 공주(公州) 낭월(朗月) 지금의 대전(大田) 동구(東區) 낭월동(朗月洞)에 장사지냈다. 저서로는 지씨홍사(池氏鴻史)·설악집(雪嶽集) 등이 세상에 전한다.

설악전(雪嶽傳)에 의하면 선생은 본시 무명인사라 하였다. 설악전은 자신이 지은 전기이다. 여기에 그 대략을 들어보기로 한다.

젊은 시절에 복회·신농씨에 뜻을 두어 오대(五代)를 거쳐 이르기를 「요순(堯舜)에 읍양(揖讓)과 손순함은 자도(子道)의 결단이라면 탕무( 武)의 정벌(征伐)은 군도(君道)의 폐단이며 춘추시대 이하는 족히 논할 것도 없는 것이다. 중용과 대학의 도학을 걱정하고 신독(憤獨)하는 것이라든지 논어와 맹자의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이며 시경·서경·주역 등을 그 징험과 창조, 경계와 그 폐단을 구제하는 것들이다. 즉, 시경은 정치의 변천사를 징험한 것, 주역은 만물의 창조와 인간의 경계를, 서경은 정치의 폐단을 구제하는 것이라며 폐단은 행하기 쉬웁고 폐단을 구제하는 것은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라고 하면서 드디어 세상에 출세할 뜻을 버린 것이니 그 앞서의 학자들도 말하기를 오늘날 세상 다스림은 공자가 다시 나신다 해도 마땅히 과거에 응하였으리라 하고 드디어 과거공부에 열중하였으나 온 몸을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마음을 학문에 두어 시속 글을 모두 거두어 일가(一家)를 이루고 오직 진리에 순응하는 바 그 배움에서 하나의 이치를 얻으매 반드시 그 본말(本末)과 시종(始終)을 궁구하였고, 한 글자를 알았으면 반드시 그 상형과 소리 또는 점획(點劃)을 궁구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이론이 주자학(朱子學) 논리(論理)에 합하면 마음 속에 지니고 반대되면 버리고 하여 한 문제를 물으면 알지 않는 것이 없고 물으면 그 근원을 강구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비록 촌에서 하는 말일지라도 하나의 이치를 찾아보고 알지 못하는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충심으로 대하여 조금도 마음을 속이는 일이 없으며 그에 잘하는 것이 있으면 비록 천만인(千萬人)이 시끄럽게 하여도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였고, 늘 종일토록 앉아 있는 때에도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면, 성인(聖人)의 공부는 다만 하나의 경자(敬字)가 있을 따름이라면서 더욱 그윽하고 홀로 있는데 청하여 근신하였으므로 그 기운이 궁(窮)하더라도 굳어지지 아니하였다.

중년(中年)에 와서는 술도 즐겨 마시고, 거처를 정하여서는 기화임초(奇花壬草)를 가리지 아니하였다. 또 친히 의서를 읽어서 치료하였고, 상사(喪事)가 나면 상례(喪禮)를 읽고 장사(葬事)지내면 음양가서(陰陽家書)를 읽고 제사 때면 제례(祭禮)를 읽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병서(兵書)를 읽고, 농사 때면 농서(農書)를 보고하여 이웃사람들에 가르쳐주고 하였다.

공(公)의 평생은 주자학(朱子學)에 집중한 것이 그 자서전(自敍傳)에서 보인다. 그 글중에 보면

客曰 先生學朱子者也 先生笑而不答
(손이 이르기를 선생은 주자를 배우는 자입니다 하니 선생이 웃으면서 대답이 없더라.)

라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權寧遠》

 

 

 

池氏鴻史 

일사 古952-J56j> 

간행연도 미상. 池光翰(朝鮮) 편저. 

1책(零本). 목판본. 29.2x20.2cm. 

지광한(생몰년 미상)이 鑑戒될 만한 중국의 역사와 姓譜를 모아 해설하여 간행한 책. 저자 자신의 서문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지광한은 영조 때의 학자로 평생 사학연구에 힘썼다고 한다. 이 책 외에 1750년(영조 26)에 간행된 완질본으로 <奎1256>, <奎1565>, <奎1802>, <奎3278>, <奎4061> 등이 남아있는데, 이 들은 총 17권 17책으로 되어 있다. {권1} 서 {권4} 지는 太古의 盤古부터 明朝까지의 중국의 역사를 다룬 帝王統紀 이고, {5권}에서 {17권}까지는 성씨별로 분류하여 각 성씨에 해당하는 인물의 略傳을 실은 姓氏韻彙로 나뉜다. <일사 古952-J56j>은 이 중 제 4권의 唐朝에서부터 明朝까지를 다룬 제왕통기의 마지막권이다. 자세한 목차와 내용은 규장각 한국본도서해제 ≪지씨홍사≫ (史部1. p.72) 참조.(나희라) 

 

 

池氏鴻史(奎1256,奎 1565,奎 1802,奎 3278,奎 4061), 池光翰(朝鮮)著. 

17卷 17冊 木板本 33×22cm. 

四周單邊 半郭:21.2×17cm. 

有界 12行 23字. 

版心:上下花紋魚尾. 

序:池光翰. 

池光翰(生沒年未詳)이 1750년(英祖 26) 鑑戒될 만한 中國의 歷史와 姓譜를 모아 해설하여 간행한 책. 

帝王統紀와 姓氏韻彙로 나뉘었다. 

帝王統紀는 尙書·毛詩·禮記· 春秋·左傳·山海經·戰國策·馬史·漢書·白虎通 ·家語 ·風俗通·綱目·名臣言行錄 등 61종의 古書를 참고하여 中國의 太古時代 盤古로부터 夏·殷·周를 거쳐 明王朝까지로 끝에 后妃·嬪檣·公子·王孫 등에 관한 것도 附記하였다. 

正統을 먼저 싣고 僭僞한 나라나 僭亂한 것은 그 끝에 附記한 것이다. 또 正統은 朱子의 綱目을 따라 文化·血統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리고 歷代 法制의 연혁, 政令의 득실, 災異의 照應 등 후세에 鑑戒가 될만한 것은 상세히 하였는데 그 記傳은 左丘明의 左傳을 본받아서 대의명분을 밝혔다. 「姓氏韻彙」는 凌 迪知의 姓譜를 따라 平·上·去·入의 韻字別로 실어서 찾아보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序文에 의하면, 池光翰은 英祖 때의 학자로 평생 사학연구에 힘썼다는 정도 밖에 알 수 없다. 

卷頭에는 1750년(英祖26)의 自序와 凡例, 초入群書(引用書目)가 있다. 

{권1}:太古의 盤古, 天皇, 地皇, 人皇, 皇伯, 庸成氏, 栢皇氏, 昆連氏, 太昊伏羲氏, 炎帝, 黃帝, 전頊, 帝곡, 帝堯, 帝舜을 거쳐 夏·殷· 周 三代, 東周까지 실었으나 歷代 임금 중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이 없는 경우는 君號만을 기입하여 계통만 이어 놓았다. 

{권2}:春秋時代의 12國과 戰國時代의 7國. 各國의 임금을 중심으로하여 기술. 

{권3}:秦始皇帝로부터 西漢, 東漢, 後漢, 西晋, 東晋, 宋, 齊, 梁까지. 이속에 陳勝, 項羽, 田橫, 新의 王莽, 魏(曹操), 吳(孫權) 및 南北朝, 北朝魏 등은 正統이 아니라는 뜻에서 附字를 써서 실었다. 

{권4}:唐, 梁, 唐, 晋, 漢, 周, 宋, 南宋, 元, 明까지. 吳越, 南唐, 後蜀, 西夏, 遼, 金 등은 正統이 아니라하여 附字을 써서 王朝 사이에 실었다. (이하는 「姓氏韻彙」이다. ) 

{권5}:東氏의 東方朔을 비롯하여 충氏, 終氏, 馮氏, 熊氏, 豊氏, 蒙氏, 公父氏, 公孫氏, 洪氏, 董氏, 孔氏등 20姓氏의 74명과 孔子의 門人 및 孟子의 門人 등. 

{권6}:隨氏, 施氏, 李氏등 16個 姓氏의 84명. 

{권7}:韋氏, 魏氏 등 16個 姓氏에 88명. 

{권8}:吳氏, 蘇氏, 杜氏 등 32個 姓氏에 104명. 

{권9}:梅氏, 崔氏, 陳氏 등 29個 姓氏에 荀卿, 陳平 등 116명. 

{권10}:韓氏, 桓氏, 班氏 등 18個 姓氏에 韓非, 桓榮, 扁鵲 등 73명. 

{권11}:錢氏, 趙氏, 邵氏 등 27個 姓氏에 錢起, 趙雲, 邵雍 등 90명. 

{권12}:馬氏, 謝氏, 羊氏 등 15個 姓氏에, 馬援, 謝安, 羊祜 등 106명. 

{권13}:王氏姓으로 王전, 王촉, 王羲之 등 65명. 

{권14}:莊氏, 楊氏, 程氏 등 23個 姓氏에 楊朱, 楊震, 黃子澄, 彭祖, 程顥, 程이 등 79명. 

{권15}:丙氏, 孟氏, 劉氏 등 25個 姓氏에 丙吉, 孟郊, 鄧艾, 歐陽修 등 108명. 

{권16}:由氏, 冠氏, 范氏 등 23個 姓氏에 由余, 冠準, 范려 등 69명. 

{권17}:陸氏, 郭氏, 薛氏 등 26個 姓氏에 陸賈, 곽光, 岳飛 등 61명. 이들 姓氏는 人物略傳의 성격을 띠고있다. 

鄕士로서 여러 전적을 섭렵하여 이만한 책을 이루기에는 많은 정력이 기울여졌겠으나 史書라고 하기에는 미흡하다. 

 

 

 

동이열전

 

 

공빈(孔斌)이 기록하였다는 <동이열전>의 원문과 번역문 입니다. 
東夷列傳 全文

東 夷 列 傳 (註 檀奇古史 附錄)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 
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稱之, 
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 
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 
余亦欲居東夷之意 
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 
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 與吾中華 相有友邦之義 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

吾先夫子 印夷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 故余亦有感而記實情以示後人焉

魏 安釐王 十年 曲阜 孔斌 記 (字 子順)

 

동방에 오랜 나라가 있으니 이름하여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별자리 분류로는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방향(동북방)이며, 땅은 선백(鮮白)에 접해 있었다. 선백(鮮白)은 선비(鮮卑)


처음에 신인(神人 : 道를 통한사람) 단군(檀君)있었는데 마침내 아홉 이족(九夷) 의 추대에 응하여 임금이 되었으며 요(堯)임금과 더불어 병립하였다.

순임금(虞舜)이 동이(東夷)에서 태어나서 중국에 들어와 천자가 되어 다스리기에 이르니 많은 왕들 중에서 탁월하게 뛰어난 분이셨다.

자부선인(紫府仙人 : 동이족의 선인)이 학문에 통달하고 다른 사람보다 지혜가 있으니 황제 헌원이 그에게서 공부하고 내황문을 받아와서 염제 신농씨 대신 임금이 되었다

소련과 대련(동이족으로 공자선생등이 '효경'등 에서 언급이 자주 되는 인물)이 부모의 상을 잘 치뤄 3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3년을 근심하니 나의 할아버지께서 칭찬하셨다.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도산(塗山)에서 회맹(會盟)할 때에 부루(扶婁)께서 몸소 임하시어 나라의 경계를 정하였다.

유위자가 하늘이 낳은 성인으로 훌륭한 이름이 중국에도 넘쳐 흐르니 이윤이 그 제자로 공부해서 은나라(동이족왕조) 탕임금의 어진 재상이 되었다.

그 나라는 비록 크나 스스로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 병력은 비록 강하나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으며, 풍속이 순후(淳厚)하여 길을 가는 사람이 양보하고 먹는 사람은 밥을 상대에게 권했었고 남녀가 처하는 곳을 달리하여 앉은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니 동방예의의 군자국(東方禮儀之君子國)이라고 할 만 하다.

이런 연유로 은나라 태사(太史)였던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조정에서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어서 동이(東夷)의 땅에 피해 가서 거처하였고 우리 선대 어른(공자)께서 동이에 거처하고자 하셨으며 누추하지 않다고 여기셨다. 내 친구 노중련(魯仲連) 역시 동쪽 해안 지방을 답사할 뜻을 가지고 있고 나도 역시 동이에 거처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왕년(往年)에 동이의 사절이 (우리나라 즉, 魏나라에) 입국하는 것을 살펴보니 그 몸가짐이 대국인(大國人)의 금도(衿度)가 있었다.

동이는 대개 천 여 년 이래로부터 우리 중화(中華)와 서로 우방의 의리가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서로 와서 거처하고 가서 사는 경우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우리 선대 어른께서 동이가 누추하지 않다고 여기신 것은 그 뜻 역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깊이 느낀 바가 있어 이 진상을 기록함으로써 후인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서기 268년) 곡부(曲阜) 공빈(孔斌)이 기록하다. (자(字), 자순(子順))

 

* 이 내용은 단기(檀紀) 4283년(서기 1950년)에 경찰교양협조회(警察敎養協助會)에서 간행한 발해국 대야발(大野勃) 저, ≪단기고사(檀奇古史)≫의 164쪽 <부록>에 실려있습니다.


홍사(鴻史)서문

위 글은 홍사(鴻史)라는 책의 서문으로 쓰여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즉, 단기고사(檀奇古史)에 부록(附錄)으로 실리기 전에 먼저 홍사(鴻史)라는 책의 서문으로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서기 268년)이라는 시기까지 똑같은 것으로 봐서 단기(檀紀) 4283년(서기 1950년)에 경찰교양협조회(警察敎養協助會)에서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발행할 때 누군가 홍사(鴻史)라는 책을 참고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홍사(鴻史)는 민족역사학자 송호수박사님이 소장하고계시는 책으로 어떤분이 올바른 우리역사를 밝히는데 사용해 달라고 기증한 책이라고합니다. (저서 "한겨레의 뿌리 길" 참고)

내용은 똑같고 출전만 틀리게 동국열전(東國烈傳)으로 되어있다고합니다.

 

 

 

 

 

 

 

 

 

 

 


1950년(단기 4283년)에 경찰교양협조회(警察敎養協助會)에서 대야발著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발행하게 되는데 이때 누군가가 홍사(鴻史)라는 책에 실려있는 '동이열전' 이란 글을 을 참고하여 동국열전(東國烈傳)으로 제목을 바꾸어 단기고사(檀奇古史)에 부록(附錄)으로 집어넣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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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겸(孔謙)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대만 자료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 자료에 의하면 공겸은 숙량흘의 8대손 곧, 공구(孔丘)의 7대손이 됩니다. 


孔子世系 (공자세계)

名字 世代 

微子   
微仲衍 十四世祖 
宋公稽 十三世祖 
.

.

伯夏 祖父 
叔梁紇 父 
孔丘  공구<-(공자의 본명) 
孔鯉 子 
孔伋 孫 
孔白 曾孫 
孔求 玄孫 
孔箕 六代孫 
孔穿 七代孫 
孔謙 八代孫 공겸<-- (8-1(공자자신) =7대손)
孔鮒、孔樹、孔騰 九代孫 
孔忠 十代孫 
孔武 十一代孫 

 

--홍사가 위서라고 주장하는 초록별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주장의 요지는
1-『사기』의 <공자세가>에 공자 가계도에서 공겸이나 공순이 없다는 것이다.
2-『자치통감』에 의하면 공빈은 위나라 안리왕의 재상이다. 그런데 현 군주의시호인 '안리(安釐)'를쓰다니..말이 되는가! <동이열전>을 조작해낸사람의 역사적 교양 수준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 아래는 그의 글 캡쳐내용이다.-----------------


------------------------------------
--그럼 공식적인 공자의 가계도을 찿아보자--

사마천(司馬遷)의 <史記> 제47권 공자세가조(孔子世家條) 에서는 `공구(孔丘)는 성인(聖人)의 후예다. 그 조상은 송(宋)에서 멸문의 화를 당한일이 있다.'고 썼으며 <史記>보다 300여년 앞서 기록 되었다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소공(昭公) 7년 9월조(月條)에 쓰여진 내용을 사기에 그대로 인용 하다시피한 글인데 공자(孔子)의 혈통(血統)을 증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문구(文句)로서 양쪽책에 똑같은 내용으로 쓰여 있다. 
즉 현재 사마천의 사기의 공자세가조 와
춘추좌씨의 소공에 관한 내용 과
자치통감의 내용을 통해
아래와 같은 "공자세가대종세계도"을 만들어 져있더군요 --위키피아

그리고 공겸에 관한것도


또한 사기에의 내용중에
공겸이 나중에 공빈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는 내용이 있다고 하더군요.
결국 공빈=공겸은 공자의 7대손이 맞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그리고 공빈이 그의 현 안리왕의 시호을 썼다고 했는데..

안리왕이 살았을때 이전에 썼던 동이열전을 나중에 안리왕이 죽은후 시호을 충분히 수정할수 있죠.

 

#동이열전 #東夷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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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numi 2017.05.29 17:42
    환단고기(위서이야기가 많지만 다른 역사책들도 단지 논리적이 추론만 있을뿐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어느책도 정확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환국(BC 7199년 ~ BC 3899년) - 하늘의 신 환인(桓因)

    배달국(BC 3898년 ~ BC 2333년) - 환인(桓因)의 아들로서 지상에 내려온 천손(天孫) 환웅(밝은땅 배달국으로 배달의 민족)

    고조선(BC 2333년 ~ BC 238년) - 하늘에서 무리 3,000명과 풍백·우사·운사를 이끌고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세우고, 웅녀와 결혼해 아들인 단군이 탄생(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아사달은 단군조선의 도읍지이며 아사달에 도읍하고 나라를 건국한 시기는 중국 신화 속의 제왕인 요(堯)와 같은 시기라고 한다.


    일본에 전해지는 천손강림 설화와 환웅의 강림 설화는 대단히 유사하다.

    강림신화는 동북아 몽골리안계통의 민족에게 매우 흔한 것으로 일본이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걸 생각하면 어찌보면 당연할수도 있다.



    http://lview.m.ezday.co.kr/app/view_board.html?q_id_info=156&q_sq_board=6543785




    사실 단군왕검이 한반도를 통치했다고 하더라도 환인의 아들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고 수도를 아사달로 정했을 때 기존 토착민들을 지배하여 통치했던 단군은 동쪽으로 건너온 유목민일수 있을 것이요,

    그럼 우리는 토착민과 북방계 유목민들의 후손으로 봐야할 지, 토착민의 후손으로 봐야할 지 아주 혼란스럽다.




    동이는 동쪽 오랑캐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도 사용되었으며, 한국의 옛 나라들은 자국의 동쪽에 위치한 국가나 부족을 동이라 불렀던 흔적이 남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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